사라져가는 우리의 멋, 맛
유영삼(보은문학회 총무)
1999-08-28 보은신문
그나마 농촌의 허름한 집 뒤뜰에서, 도시민의 주택 작은 공간의 마당 한켠이나 옥상위, 오래 된 저층의 연립주택의 배란다 철근 난간에서, 나름대로의 장맛을 익히며 우리의 것을 지키고 있다. 조용히 바라보며 마음을 안주할 수 있는 장독대의 풍경이야말로, 어머님 품속 같은 따스한 정감이 있는 고싱 아닐까. 장독대와 어머니, 곱게 차려입은 한복의 선과, 질그릇이 주는 은근한 색감과 원만한 곡선미는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이다. 어디 멋 뿐이랴,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내림의 맛과 정서가 있는 곳이 아니던가. 정한수 한그릇 떠 놓고 가정의 안녕을 빌기도 하던, 신성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장독대를 만드는데에는 몇 가지 원칙을 두기도 했다.
추녀에서 멀어야하며, 볕 바르고, 통풍과 배수가 잘되는 약간의 높은 지대에 위치해야하고, 장독키보다 큰 나무나 화초는 멀리하여, 그늘이 지는것과 벌이나 파리등 곤충이 끼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장독대가 하나 있다. 앞 마당보다 넓었던 오십평 남짓 한 뒤 뜰 중앙에, 넓다란 구들장 돌을 켜켜로 쌓아 올려 그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붓꽃을 심었고, 사방 일미터 넓이의 둘레에 잔디를 심어 바람이 불거나, 세찬비가 와도 먼지도 일지않고 흙탕물도 튀지 않았던, 아버님의 정서가 밴 장독대.
나는 그곳에서 처음 붓꽃을 알게 되었고, 봉긋한 감보라 빛 꽃봉오리를 보고 붓끝을 연상하며, 잔디에 누워 파란 하늘에 글시를 써보곤 했다. 푸른 잔디가 그 빛을 잃을 때 쯤 가을 볕 아래 책을 읽으며, 오물대던 장독대 위 채반에 널린 삶아 말린 고구마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냉장고가 없던 그 시절 장독대는 갖가지 음식 저장고였다. 이튿날 새벽밥을 짓기 위해 삶아 놓은 보리쌀이며, 추석때 송편, 호박고지, 고구마 말림, 고추, 한 겨울 항아리 속 홍시맛은 도 어떠냐…
눈이 소복히 쌓인 겨울 장독대 위, 가정의 솟아오른 얼음은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언제 어느때고 항아리 뚜껑만 열면 먹을 것이 유림되어 있던 장독대, 그 장독대를 맴돌며 놀던 유년 시절의 추억은 어머님의 장맛을 더욱 그립게 한다. 결혼 후 그 풍경속에 들어가 어설프게 어머님을 흉내 내 보지만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몇 해 전 까지만해도 시어머님이 주시는 메주로 장을 담그곤 했다. 그 해에는 그 어는 해보다 장맛이 잘 들었다. 누런 황금빛을 띤 장맛은 짜지도 떪지도 않으면서 구수한 맛과 함께 단맛까지 돌았다.
아침 저녁 옥상을 오르내리며 장독 뚜껑을 여닫기를 몇몇날, 그러던 어느날 장독 뚜껑을 열다 어이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메주 두장 분량의 된장이 한 사발 정도는 남았을까, 밤 새 없어진 된장 독 안에는 알 수 없는 이의 손가락 무늬가 선명했다. 누구인가 그도 고향을 떠나 어머님의 장맛이 그리웠나보다, 이해를 하다가도 노랗게 잘 익은 장맛을 보지못한 서운함은 증오심으로 변해갔다. 그 사건 이후로 어머님은 메주를 주지 않고 시골집 장독에 우리몫까지 다담으셨다. 몇 칠 먹을 만큼의 양을 덜어다 냉장고에 두고 먹어 보지만 장독대의 독에 든 장맛만 못했다.
한번도 먹어 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된장 사건은 나에게 많은 것을 빼앗아가 버렸다. 유명무실 해버린 옥상의 장독대를 얼마 전 좁은 마당 한켠으로 내려 놓았다. 크고 작은 항아리가 담장 밑에 나란히 서 있다. 소금이나, 마른 고추를 담아두고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한껏 멋스러움으로 운치있던 아버님의 장독대를 연상하며, 어머님의 장맛을 혀 끝에 담아 본다. 아직 모양새도 갖추지 못한 장독대이지만 아이들의 눈길이 다가와 주기를 바라며 요리조리 옮겨본다.
좁은 마당에서 두 사내아이가 공을 차는가 싶더니 질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큰 아이가 연발 창문 쪽을 향해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 혼을 내 주기보다 거기 있는 장독대를 바라봐 주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낀다. 주거 공간이 바뀌면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것을 제대로 바라보고 재연할 수 있도록 우리 아이들의 입맛과 정서를 지켜주고 싶다. 구리의 맛과 멋을 지켜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그속에서 그리움을 키울 수 있고, 만날 볼 수 있는 장을 담그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 우리의 멋과 맛을 제대로 우려낼 수 있는…
<정이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