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하느님’

2013-07-25     최동철
요즘 나라 경제가 어려워 살기가 힘들다고들 한다. 돈과 권력 쥔 사람들조차 너스레를 떨 정도다. 하면 서민의 삶은 훨씬 더 고달프다는 의미다. 늙고 병들어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할 가난한 이웃은 보다 각박한 나락으로 내몰리게 됐다.

종교의 역할이 대두되어야 할 때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하지 못하다. 손꼽히는 몇몇 대형교회는 재산다툼이 벌어지는 등 추한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산재된 많은 교회보다 더 많은 목사가 활동하고 있건만 험한 세상에 구원의 빛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평생을 병고에 시달렸음에도 성자처럼 살다가 6년 전 이른 살에 작고한 권정생이란 사람다운 사람이 있었다. 아동문학가 였다. ‘강아지 똥’ ‘몽실언니’ 등 그의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했다. 시골 마을 교회 문간방에서 글을 쓰며 종지기를 했다.

자신이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모아놓은 십억 여원의 재산과 앞으로 생길 인세수입 모두를 굶주리는 북한을 비롯해 분쟁지역 어린이들에게 되돌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수필집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다음을 피력했다.

‘60년대는 참 가난했다. 그러나 그때의 교회는 따뜻한 정이 있었다. 당시의 교회 회계장부를 들춰보면 누가 몇 백 원 빌려갔다가 언제 갚았다는 기록이 종종 보인다. 어려운 교인들에게 교회재정에서 꾸어주고 되돌려 받기도 했다. 가난한 전도사의 사례금은 말할 나위 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좁쌀 한말, 쌀 몇 되가 전부일 때도 있었다.

교회는 70년대에 들면서 갑자기 권위주의, 물질만능주의, 거기다 신비주의까지 밀려와서 인간상실의 역할을 단단히 했다. 조용히 가슴으로 하던 기도는 큰 소리로 미친 듯이 떠들어야 했다. 장로와 집사도 직분이 아니라 명예가 되고 권력이 되었다

같은 목사인데도 큰 교회 목사와 작은 교회 목사는 차별이 생겼다. 도시교회 목사와 농촌교회 목사 간에도 인격적인 차이가 생겼다. 인간차별은 평신도들까지도 서먹서먹하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웃으며 인사를 해도 마음을 드러내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어졌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용하여 출세와 권력과 돈을 얻으려 하고,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믿음의 전부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예수님은 많이도 시달려 왔다. 한때는 십자군의 앞장에 서서 전쟁과 학살에 이용당하기도 했다. 천국 가는 입장료를 어마어마하게 받아내는 그야말로 뚜쟁이 노릇도 했다. 대한민국 기독교 백년사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선봉장이 되어 무찌르자 오랑캐를 외쳤다. 더러는 땅 투기꾼에게 더러는 출세주의자에게 이용당하며 시달리기도 했다.

교회는 새삼스레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온 세계와 온 우주가 바로 하느님의 교회이다. 그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람이나 동물이나 서로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것을 원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냈다. 서로 섬기는 삶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준 사랑이며 그것을 위해 희생한 것이다. 이 땅위의 진짜 우상과 마귀는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