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분란 부추기는 못된 괘서(掛書)'

2013-01-31     최동철
서울 서초구에 ‘말죽거리’라 불리기도 하는 ‘양재역(良才驛’)이 있다. 조선시대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살던 곳에 파발마의 역이 설치된 데서 이름이 유래됐다. 양재도(良才道) 찰방(察訪)이 있어 중앙과 지방의 공문 전달, 관물?세공의 수송, 숙식 제공 등을 담당했다. 으레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다.

조선시대 명종 때인 1547년 9월 어느 날. 양재역에 벽서(壁書)라 불리기도 하는 괘서가 나붙었다. 붉은 글씨로 쓰인 괘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위로는 여자 임금이 정권을 농단하고 아래로는 간신 이기(李?) 등이 권력을 농락하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아니하리오……’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당시 시대상이 그러하기는 했다. 막강 권력을 휘둘렀던 윤 대비는 조선 11대왕 중종의 왕비(문정왕후)였고, 13대왕 명종의 어머니로서 수렴정치를 했다. 왕권을 잡은 첫 해 문중싸움으로도 불리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숱한 정적을 제거했다. 명실상부 조선의 제1인자가 된 그녀는 통치기간 내내 남성 기득권층에게는 불편하고 불쾌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녀처럼 남성 관료들을 쥐락펴락하며 마음껏 권력을 휘두른 여성은 이후 아직 없다. 중국 청나라의 측천무후나 종종 비교될 정도다.

여하튼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의 옥(獄)’으로 불리는 괘서는 실상 그녀의 동생 윤원형이 꾸민 자작 음모였다. 두 해전 을사사화 이 후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정적 제거를 위해 야기됐다. 곧 붕당싸움이 일어났고 공연한 이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정미사화였다.

이처럼 괘서 또는 벽서는 ‘남을 비방하거나 민심을 선동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 몰래 붙이는 게시물’을 일컬었다. 이름을 숨기고 은밀하게 남을 모함하기 위한 투서형식의 익명서도 공개된 장소에 게시한 것이면 이에 해당했다. 개인 사이의 사적인 고발에서부터 당파나 나라를 비방하고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한 것까지 각종 목적으로 이용됐다.

그러나 괘서, 벽서는 대부분 발표자의 이름을 숨겼으므로 이를 익명서로 간주했다. 내용 또한 주로 남을 모함하고 무고(誣告)하는 데 사용되어 수많은 옥사, 사화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이를 법으로 엄격하게 금했다.

익명서를 투입한 자는 교수형에 처했다. 발견한 자는 즉시 소각해야 했다. 만일 관가에 내놓는 자는 장(杖) 80, 관가에서 수리한 자는 장 1백의 형에 처했다. 피고는 처벌하지 아니하며 이를 체포하여 알리는 자에게는 은 10냥을 지급했다. 더하여 숙종 때는 괘서를 보고도 즉시 소각하지 않은 자와 그 내용을 전파한 자는 전 가족을 국경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이 추가되기도 했다. 조선의 역대왕조는 괘서사건을 엄격히 규제했다.

최근 보은 읍내에 괘서가 나돈다고 한다. 내용을 보면 발전소 유치를 반대했던 쪽을 ‘역도(逆徒)’로 표현하며 쏴붙였다. 당연히 유치를 추진했던 쪽은 찬양일색이다. 차치하고, 가뜩이나 민심이 분란한 현 시점에서 선동적인 괘서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비겁한 자들의 단순한 도발에 불과할까. 오히려 상대에게 음해를 주려는 고도의 술수일까. 막론하고 못된 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