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동학정신 되찾자

"민족의 자주독립을 표방한 동학혁명"

1999-04-10     보은신문
의로운 정신 되찾는 보은의 첫 번째 과제가 동학이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는 동학운동의 역사적 주무대였다. 이중 충청도 보은이 차지하고 있는 동학운동의 자취는 시작과 끝을 말해 주고 있어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우리 역사에 있어 동학은 역사적인 커다란 분수령이 되고 있는 사실에 비해 자칫 전설로만 전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동학의 시작과 끝이라고 하지만 눈에 띄는 흔적하나 없는 보은땅에 지금부터라도 동학의 흔적을 찾고 2천6백여명의 영혼을 달래 줄 위령비라도 세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보은을 중심으로 『다시찾는 동학현장』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주>
1894년 12월 17, 18일 양일간 벌어진 북실전투는 관군과 일본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북실에 남은 것은 전투가 보여준 잔악성만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묻혀버린 것이다. 대도소가 위치했던 외속리면 장내리의 동학 흔적과 북실전투가 남긴 동학의 흔적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북실 전투와 관련해 가장 뚜렷한 유적은 김소천가와 종곡리 다라니 마을 뒷산에 있는 석축유적이 있으며 최후를 마감한 집단매장지로 알려진 곳이다. 다라니 뒷산의 석축보루는 동학군의 최후의 보루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정확한 규모와 성격을 밝히고 복원안을 마련하여 안내판을 설치해 역사의 흔적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곳은 집단 매장지의 흔적이다.

집단 매장지로 거론되는 곳이 많이 있지만 최근 조사에 의해 가장 신빙성이 있는 곳으로 인산을 다량 함유한 토층이 상당량 매장된 안양마을 동쪽 첫 번째 계곡이 가장 확실하다. 이런 곳에 위령탑이라도 세워 유해의 흔적을 봉안하고 자세한 전투상황을 기록하여 당시 싸움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조각품으로 재현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다음으로 김소천가의 복원이다.

현재도 대지 5백 80평이 한필지로 남아있는 김소천가에 대한 재현·복원이다. 북접 동학 농민군의 지휘본부 격이었던 김소천가의 복원은 많은 재원과 현주인과의 충분한 협의가 필요하겠지만 연차적 계획을 세워 추진한다면 동학운동에 대한 재평가 및 역사적 유물로 지정할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북실전투와 관련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대략적으로 검토해 보았으나 지금 당장 추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외속리면 장내리의 동학군의 대도소가 위치하게 된 배경과 북실 전투의 학술적인 평가와 전투상황을 재현할 수 있는 시나리오 작업이 우선 추진돼 동학에 대한 이해를 높여나가야 할 것이다.

서울의 장안에는 관료 선비가 많은 반면 외속리면 장안에는 벼슬을 뒤로하고 성리학에 전념한 향반들이 많았다해서 장안이라고 묻혀진 이름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향반과 1890년 최제우가 세운 동학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인내천사상으로 귀결되는 동학과 천·지·인을 중시한 성리학은 쉽게 융화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외속리면 장내리는 성리학의 기초아래 자연스럽게 동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민주주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존재를 알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갑오 동학혁명이다. 관의 압박에 시달려온 백성들이 이에 항거·봉기한 민족의 자주독립을 표방한 것이 동학혁명인 것이다. 일제의 강압에 항거한 3.1운동 역시 갑오동학혁명의 시발이었으며 동학혁명의 기치였던 재세구민, 보국안민 사상은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민족의 자주독립과 별개가 아닌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찌든 우리 역사의 흔적을 동학혁명으로 씻을 수 있을 것이며 바른 역사교육을 위해서라도 동학혁명은 햇빛을 보아야 한다. 누군가 “일제 때 청주교도소에는 보은 사람이 많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 보은사람이 유독 많았을까 그것은 바른 말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인권을 되찾기 위한 항거였던 것이다.

동학의 뿌리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표방한 민중봉기인 것으로 전라도 정읍지역에서는 동학 유적지에 동학기념탑을 세워 갑오선열들의 의병항쟁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보은지역에 동학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외속리면 장내리 서원계곡에 설치되었던 동학 취회지의 안내판은 지난해 집중호우로 흔적 없이 사라졌고 일부 민선 자치단체장의 공약사업으로 거론 되었다가도 다시 공허한 메아리로 변해 버리는 것이 지금 보은동학의 현실이다. 우리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역사적 재평가를 받고 있는 동학 농민혁명은 보은의 의로운 정신을 되찾는 첫 번째 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