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홍

2012-09-20     김종례 (회남초등학교 교감)
열매 맺음의 달 9월도 어느덧 중순을 넘었다. 여름 내내 밤이슬 듬뿍 머금고 작열하는 태양을 바라보며 열정을 내뿜던 꽃밭 가족들이었는데, 요즘 들어 두런거리는 소리들이 점점 적막해지면서 희미해져 가는 빛바랜 사진처럼 쓸쓸히 미소 짓고 서 있는 걸 보면 측은하기 그지없다.
어쩌다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 봐도 여름날의 싱그러운 기세가 한풀 꺾이고, 벼포기는 신의 손자국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양 벌써 고개를 숙이고, 콩 포기 팥 포기 깨 포기들까지 누런빛으로 황금물결에 동참하고 있다. 흥겨운 잔칫집마냥 다채로운 여름 꽃들이 떠들썩하니 수선을 떨더니, 며칠 사이에 바람 부는 대로 점점 몸을 기울이면서 열정의 추억을 식히고 있다. 발아래 까만 씨알을 우수수 해산하느라 노곤하게 지쳐버린 분꽃은 다시는 그 귀여운 입술을 열지 않을 모양으로 앙다물고 있다.
탱탱하니 물이 올라 여인들의 마음을 유혹했던 봉선화꽃잎도 주먹만한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발아래 주저앉아 애처롭다. 가느다란 몸매를 한들거리며 바람이 불적마다 마음을 산란하게 했던 한련화의 교태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 아쉬웁고, 산나리 또한 갈 곳 몰라 방황하는 나그네처럼 이파리 몇 개 간신히 매달고 외롭게 서 있다.
아침마다 개성미 넘치는 저마다의 미소로 마음을 붙잡던 꽃밭 가족들이었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20도쯤 기울은 나침반의 고도에 밀려나서 고요한 내면을 휩쓸면서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지나가는 폭풍우의 혼을 따라서 멀리 떠나고 있다. 뜨거운 폭염 아래서 볼이 달아올라 선명한 삼채원의 빛깔을 자랑하던 백일홍마저 제 영혼을 바람에 실어 보내느라 사뭇 흔들리고 있는 중이다.
모두가 회한의 재들을 허옇게 뿌리며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다. 그 옆에 서서 불꽃같은 생명의 약동을 영혼에 흠뻑 전해 주던 목 백일홍만이 아직 제 빛깔을 잃지 않고 의연히 서 있지만 며칠 후면 이것마저 칙칙해질 것이다. 꽃밭을 가꾸어 본 사람은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생명의 섭리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한줄기 가을바람으로 인하여 이별의 왈츠를 추어대면서 서서히 한 줌의 검불때기로 사라져가는 소멸의 원리를 깨닫는 요즘이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대지의 혼을 밤새 길어 올리느라 더욱 거센 흔들림으로 버티고 서서는 머지않아 씨앗들을 발아래 우수수 뿌려놓겠지.....
다음에는 샛길을 돌아 우리 텃밭 가족들의 안부를 물어본다. 넓은 잎들이 뭉글뭉글 뭉게구름마냥 나무위로 두엄위로 울타리 너머로 활개를 치며 뻗어가던 호박 넝쿨도 벌써 누렇게 바래가며, 그 잎사귀 속에 숨기고 있던 보름달 같은 황금호박을 보란듯이 드러내고 있다. 푸르디푸른 고추밭도 붉게 물들은 홍고추들을 가지가 찢어질듯이 주렁주렁 매달고 주인을 위해 힘겹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에서 신념을 배우고 감동을 얻는다. 여름 내내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의 눈인사를 건네주며, 동고동락 Companion Vitamin을 퐁퐁퐁 날려주던 텃밭 가족들도 이렇게 이별가를 흥얼거리며 초가을 바람에 온 몸을 맡기고 신의 발자국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꽃밭과 텃밭과의 소통으로 인하여 생명수 스미는 듯 마음의 활력소가 모락모락 용솟음쳤던 여름이 미련도 없이 가을에게 선뜻 의자를 내어주고 말았다.
이렇게 계절의 혼들을 바꾸느라 동분서주하는 황금들판을 마중하면서 우리네 짧은 인생 스토리를 다시금 점검해 본다. 점점 원초적인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자아를 반성해 보면서, 반자연적인 방향으로 시시각각 질주하고 있는 세상의 주변을 둘러보면서, 9월의 산들바람 앞에서 모두가 영상초가 되어가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절감한다. 한시에 나오는 不滿百千歲憂의 삶을 탈피하고자 흙처럼 진솔하게 벌처럼 성실하게 꽃처럼 아름답게 살다가기를 소망하며 초가을 단상을 맺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