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과 지역민이 함께 겪어야 했던 고난사"
동학군 최후의 격전지 북실
1999-04-03 보은신문
동학의 시작과 끝이라고 하지만 눈에 띄는 흔적하는 없는 보은땅에 지금부터라도 동학의 흔적을 찾고 2천6백여명의 영혼을 달래 줄 위령비라도 세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보은을 중심으로 『다시 찾는 동학현장』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주>
북실전투의 진압군이 남긴 문헌으로는 김석중의 토비대략, 경상도 소모영·소모사실, 정의묵 소모일기, 이중하 갑오 12월 28일 별보,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등에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김석중의 토비대략에는 일본군과 상주 유격병간에는 야간 기습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라졌고 경국 야간 공격을 결정하고 공격의 주역은 3대대로 나눠 일본군 장교에게 유격병대를 배속시키고 삼원소위가 이끄는 부대가 당시 오심이 옆고지에서 모닥불 주변의 농민군을 공격하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 김석중이 인솔하는 별포대는 김소천가에 접근해 들어갔다.
전투는 두군데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고 마을로 들어간 공격병은 먼저 최시형등 두령들이 묵고 있다는 집을 포위해서 일제히 총을 쏘아댔다. 방안에 있던 고위 지도자 다섯명이 맞아 쓰러져서 죽었는데 이들 중에 임규호, 정대춘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채 불더미 속으로 던져졌다. 무방비 상태의 농민군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기습 공격이었다. 불의의 기습을 받아 이처럼 혼란에 빠졌던 북접 농민군은 17차례 전투를 치룬 역전의 군대답게 역습을 기도했다.
총소리를 듣고 마을 안에 들어가 있던 농민군도 반격을 가해 왔다. 바깥북실 여러마을에서 농민군들이 어지럽게 총을 발사함으로서 탄환이 비오듯 쏟아졌다. 일본군은 우세한 무기를 가지고 정면으로 공격해 왔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군은 막대한 희생을 내면서 후퇴를 계속했으며 왜뿔과 누저리 부근에서 시작된 싸움은 농민군이 밀려 나가면서 소라리와 배미를 거쳐 가마실골까지 이어졌다.
가마실 작은 골짜기 안에는 이곳 저곳에 급히 피하는 농민군이 들어찼고 일본군과 유격병은 뒤따라와서 산등성이를 점거했다. 북실에 있던 농민군과 공격해 온 일본군·유격병대는 서로 전투를 하면서 밤을 새웠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듯한 총소리와 함께 전투가 벌어지자 북실마을 사람들은 피신하지 않은 수 없었다. 더운골과 바른골 그리고 농정골등 험한 골짜기에는 병화를 피하는 사람들이 들어찼다.
다음날까지 이어진 북실전투는 북실골짜기 안에 남아 있던 일본군과 유격병대에 의한 학살극도 끔직하게 벌어졌다. 대항은커녕 추위속에서 달아날 힘조차 없는 사람들을 오후 3시경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살육하였다. 말 그대로 시산혈(屍山血海)였다. 일본군은 전투중에 총을 맞고 죽은 농민군의 수를 300여명으로 보고하고 있으며 학살된 농민군은 의도적으로 보고하지 않았으며 정부에 영남지역의 농민군 진압 상황을 보고한 12월 28일자의 별보에는 "칼로 베이거나 피살된 사람이 395명이고 그밖에 계곡의 구덩이와 숲속에 죽어 넘어진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일본군은 5∼6시간에 걸친 학살을 자행한 다음 오후 4시경 출발해서 보은읍내로 들어갔다. 읍내에서는 이틀간 머무르며 흩어진 농민군의 동정을 염탐하였다. 당시 북접교주 최시형과 통령 손병희 등은 가까스로 충주방면으로 도피하였다. 농민군이 완강히 버티는 동안에 북접농민군의 최고지도부는 공격군의 집중공격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투상황을 겪은 북실마을과 주민들은 어떤 고처를 당했을까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호에서는 보은지역과 동학정신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