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할머니의 곡(哭)소리’

2012-09-06     최동철
동트기 직전, 새벽녘에 한 할머니가 동네 개울가에서 목 놓아 울었다. 그렇게 구슬플 수가 없었다. 모골이 송연했다. 단순한 흐느낌 정도가 아니었다. 70여년 인생살이 뭉친 한을 허공에 뱉아 내는 듯 했다. 피를 토하며 운다는 두견새의 울음보다 더 처절했다. 거의 한 시간을 그렇게 울었다. 온 동네 안은 안개가 감싸듯 적막감에 휩싸였다.

남편은 몇 해 전 저승으로 갔다. 성장하여 가정을 꾸린 아들, 딸자식들은 고향 집을 떠나 대처에서 산다. 가족들이 흩어지기 전 시끌벅적했던 집은 몇 해째부터 허리 굽은 할머니의 나 홀로 집이 됐다. 적막강산이다. 그래서 날만 새면 밭에 나가 농사일을 한다. 힘에 부치지만 그나마 시간을 빨리 보낼 수 있어 좋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은 제 어머니 힘든 줄도 모르고 철부지같이 주문을 마구 해댄다.

도시는 농산물 값이 비싸고 맛도 없으니 이것저것 직접 심고 가꾸어 달라고 은연중 성화다. 하긴 이러한 것들 때문에 몇 주 혹은 몇 달에 한 번씩은 손자 손녀들을 대동하여 온다. 그 즐거움 탓에 할머니는 허리통증을 참고, 무릎팍 통증을 참으며 밭에서 꼬부리고 일을 한다.
그런데 얼마 전,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금세 했던 행동을 잊고 반복한다. 자식이 좋아했던 반찬이라며 이 그릇 저 그릇에 똑같은 반찬을 계속 담아 내온다. 치매다. 본인도 그걸 알아챘다. 그리고 불현 듯 새벽녘에 서러움이 그렇게 북받쳐 왔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가물에 콩 나듯 들르는 자식들은 알 턱이 없다. 그러니 한바탕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다.

요즘 농촌지역은 홀몸 노인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뒷집, 앞집, 옆집 또 옆집도 할머니가 혼자들 산다. 혼자 사는 할아버지들도 많다. 빈집도 늘어간다. 많아지고 늘어나는 만큼 정부의 사회복지정책도 발맞춰 나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제도는 지원 여부를 ‘선별’하기 위한 조건을 중심으로 제도가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농촌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농촌만을 위한 복지제도의 구현’은 아직 꿈조차 못 꾼다.

거의 모든 복지정책은 도시지역 노인, 장애인, 여성, 청소년, 빈민층에 초점이 맞춰져 수립되고 시행된다. 농촌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조차 대부분이 농사일 보다는 도시에서 살며 사업 등 다른 업종에 종사해 출세한 사람들이니 농촌의 실상을 잘 알지 못한다. 농촌을 모르니 농촌의 특수성과는 무관한 정책이 입안되어도 개정이나 수정안을 내지 못한다. 농촌을 잘 아는 사람을 뽑아야 농촌을 위한 일꾼노릇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언필칭, ‘보편적 복지는 포퓰리즘’이라고 막연하게 외치는 위정자들도 있다. 거의는 복지혜택이 필요 없는 부자들이다. 등록재산만 수 십 억 원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회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입증됐다. 그럼에도 현재의 우리나라 복지를 ‘과잉복지’, ‘무조건 복지’라고 규정하고 외치는 현직 고위관료도 아직 멀쩡히 있다.

하지만 어려움에 처했을 때 최소한의 생활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고, 노인성 질환이 발생하면 요양보호시설에 입원시키는 보편적 복지를 국가가 베푼다면 얼마나 희망적이 될까. 특히 농촌지역에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편안해 할 것이다. 어쩌면 그 할머니도 그렇게 섧게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꿈꿔보려 한다. 보편적 복지국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