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부터 국신과 곡식에게 제사지낸 전통이어와
사직단부지 군에서 매입, 역사교육장 활용 여론
2002-04-06 곽주희
이 사직단제는 그 명맥을 유지해 오다 1914년 일제시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회인군이 보은군으로 편입되면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해방 후 다시 전통행사로 이어오다 6·25 전쟁으로 다시 중단되었으며, 지난 60년대 이후부터 사직단에서의 행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후 점점 잊혀져 가는 우리 고장의 문화유적 사직단 전통 제례 행사를 계승 발전시켜 역사의 산교육장으로서의 교육적 가치와 면민 화합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지난 94년과 95년 정월대보름을 맞아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기원제를 올리는 등 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회북면 주민들은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사직단 부지가 사유지로 되어 있어 문화재로의 지정과 보호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회인현 사직단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서울의 사직공원, 부산의 사직동, 청주의 사직동 등 전국의 여러 지역에 명칭만 남아있는 것에 비해 드물게 회인현의 사직단의 제단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서울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는 회인군지에 위치와 모양을 알리는 도면이 남아 있어, 역사적 유물로써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회북면 주민들은 “사유지로 되어 있는 사직단 부지를 군에서 매입을 추진,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도록 행정적 근거를 마련하고 원형 그대로 유지 보존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회북면민의 날을 통해 사직단제를 봉행하고 있는 지금, 전통 제례 행사의 전승과 함께 문화유적인 사직단의 재조명을 통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행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직단(社稷壇)은 조선시대에 나라의 신과 곡식을 맡는 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으로 보통 도성의 서쪽에 설치하며, 규모는 단 2개를 만들어 사단(社壇)은 동쪽에, 직단(稷壇)은 서쪽에 배치해 사방이 각각 2장5치로 북쪽에서 남으로 향하게 했고 높이는 3척인데 사방으로 계단 3층을 쌓았다고 전한다. 또 사단에는 국사(國社)의 신위를 남쪽에서 북을 향해 봉안하고 후토신(後土神)을 배향시켰고 직단에는 국직(國稷)의 신위를 봉안하고 후직(後稷)의 신을 배향시켰다. 제례는 2월과 8월 및 동지와 제석에 문묘(文廟)와 종묘(宗廟)의 예를 따랐다.
각 지방에도 관아의 서쪽에 사직단을 세우고 치제하여 국태민안과 풍년을 빌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