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청산
김 건 식(보은읍 교사리, 전 군 농정과장)
2002-03-16 보은신문
정부 수립이후 일제청산을 위해 반민특위가 발족했지만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친일파의 방해로 무산되고 지금까지 친일당사자와 그 후손들의 교활한 방해공작으로 친일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는 청산을 못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명단 발표를 시발로 일제강점 35년간의 친일청산 작업을 해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광복희 명단과는 달리 추가 발표된 집중 심의대상 16인을 포함하였다하여 그 발표의 의미는 뒷전으로 하고 창업주가 포함된 일부 언론이 친일파 선정과 관련된 문제를 부각하면서 ‘의원 몇몇의 자의적 선정’ ‘정치·감정적 의도’하면서 시비를 걸어옴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친일파 후손들로 인하여 또다시 불발로 끝날지 모른다는 우려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번에 발표된 명단은 그 동안 재야 사학계에서 끊임없이 밝힌 내용에서 새삼스러운 것이 별로 없다. 지금 꼬투리가 된 16인은 1993년 돌베개에서 출간한 「친일파99인」과 1994년 청년사 간행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 개인별로 친일 행각이 소상하게 소개된 인물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친일 행위가 없는데도 모함을 당한 것은 아니다.
나는 1991년 돌베개에서 출간한 임종국 지음 「실록친일파」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학창시절부터 존경해 왔던 정치가와 문화계 인사가 놀랍게도 친일파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나를 당혹하게 한 사실이 있었다. 1987년 3월 어느날 노년기에 어떤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언행에 지성이 풍겼고 세련된 보기드문 노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조부인 通訓大夫行睿濬陵令과 시부인 通政大夫行沃川郡守의 묘비문을 부탁하였는데 자신이 직접 쓴 메모에 의하면 시부는 1883년에 출생하여 1907년 판임관으로 탁지부 주사로 관계에 나가 한일합방후인 1913년 단양군수가 된 후, 괴산·충주·진천·옥천군수 등 20여년간 군수로 재직하고 책임관으로 승진 성균관 사성을 지낸 인물이었다.
일제시대에 군수를 했다는 것이 꺼름칙하여 완곡하게 거절하였으나 노인이 너무나도 간청하므로 이력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짓고 "아!슬프다 망국의 지성인으로 관직을 버리지 못하고 머물러야 했던 고민과 고통을 어찌 슬프다 아니할 수 있으랴 국권회복과 독립쟁취의 구국운동은 숭고한 삶이지만 망국의 슬픔을 동족과 함께 나누며 갖은 일제의 수모와 박해를 인내하며 민족의 양심을 지킴도 어려운 일이다"라고 써주었는데 바로 그 주인공이 친일파로 기록되었으니 어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즉시 알아보니 웬일인지 모르나 묘비가 세워져 있지 않음을 알았으나 지금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없다.
대한매일 보도에 의하면 그는 1936년부터 1945년 해방시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다. 역사의 청산작업이 제때 이루어졌다면 한글세대인 내가 그와같은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단이 발표된 인물이 비록 대부분 고인이 되었고 여전히 막강한 세력이 온갖 트집과 왜곡을 자행하고 있지만 반민족행위자들의 죄상을 다시 덮어 둘 수는 없다. 단 한번의 사죄나 반성없이 변명과 심지어는 애국지사로 변신하여 살아생전 영화를 누린 그들에 대하여는 역사의 심판이 있어야 한다.
의원모임이 제안한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친일 부일무리들의 옥석을 가려 역사의 부정적 유산을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