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의 피난길

2010-06-10     김정범(내북면 봉황리)
달력을 또 넘기고 보니 6월이 되었다. 담장에 걸쳐있는 장미가 요즈음 한 낮의 태양만큼이나 더욱 붉은 꽃을 피웠고 신록이 무르익은 산야는 생동감이 넘치는 자연의 섭리로 수많은 생명을 품어 보듬고 있다.
이렇게 활기차고 은혜로운 계절임에도 이때가 되면 잊혀 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이 6.25이다.
당시 몇 년 동안은 사변이라 불리 우며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다만 북한의 남침으로 동족 간의 전쟁이 일어난 날로만 알려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6.25전쟁은 피아간 250만명의 인명 피해와 천만명의 이산가족, 그리고 20만명의 미망인과 10만명의 전쟁고아를 내었고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념적 사상마저 초월한 적대적 대치 상태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 민족의 불행한 역사의 시대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천안 함 사태로 인한 국민감정과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전쟁을 운운하는 양측의 긴박한 대치는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6.25를 경험한 세대들은 당시의 상황을 상기하지 수 없으며 지금의 세대들도 사실을 바로 알고 이해하는 의식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어려서는 해 마다 이때쯤이면 영락없이 앞산에서는 무엇이 그리 서러워 소쩍새가 밤새워 울었고 한밤이면 부엉이도 뒷창밖 커다란 굴밤 나무에서 그렇게 울었다. 아마도 6.25전쟁이 터지던 날도, 우리가 피난을 떠나던 날도 그렇게 울었으리라.
그러니까 1950년 6.25가 일어나던 해 내 나이 9살로 초등학교 3학년 이였다.
아버지께서 사변이 일어났다고 야단이셨고 어른들은 불안 해 하였지만 사변이 무엇인지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나는 그저 학교에 안 가고 노는 것만 좋아 했던 것 같다.
며칠이 되지 않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피난을 가야한다며 짐을 꾸리고 가지고 가지 못 할 물건들은 다락방에 감추거나 땅에 묻기도 하였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교회 장로님이셨기 때문에(그 때는 기독교인이 많지 않았다) 유물론 이론에 쇠뇌 된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은 반동분자로 낙인 되어 남보다 먼저 피난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윽고 피난길에 올라 집을 떠나던 날 구루마에 짐을 가득 싣고 어른들은 모두 남부여대(男負女戴)하였고 어머니께서는 우시느라 발걸음을 떼지 못하셨던 것도 잊혀 지지 않고 있다. 나도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메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보리를 볶아 빻은 미숫가루였다.
어른들이야 어쨌든 나는 소풍 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고 그렇게 19명의 우리 대 가족의 이동이 시작 되었다.

추풍령을 넘을 때 까지만도 피난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김천을 지나서 부터는 인산인해였다.
지금은 그 곳이 어딘지 잘 모르지만 하판이라는 곳에서 며칠을 머무를 때에는 미군 전투기가 바로 눈앞에서 추락하는 것을 목격 하였는데 다행히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탈출 하였으나 기체는 불길에 휩싸이며 폭탄이 터지므로 무서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얼마 후 조용 해 지자 현장으로 달려가게 되었고 조그만 베어링 하나를 주웠는데 지금도 그 것을 가지고 있다. 그 후 계속 남쪽으로 걸어가는데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며 피난민을 산으로 몰아 대부분의 짐을 버리고 팔공산을 넘을 때에는 비오는 밤에 아군과 적군의 진지 사이에서 불안 해 하기도 하였다. 또 어느 날은 몹시도 무더웠는데 어느 마을에 이르자 모자인 듯 젊은이는 물지게로 물을 퍼 나르고 노파 한분은 피난민들에게 물을 떠 주고 있다. 지금도 그 때의 물맛을 잊지 못하고 있음은 아마도 그분의 마음을 더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낙동강을 건널 때에는 미군 전투기의 오인으로 피난민 행렬에 기관총 사격을 가하여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소도 한 마리 죽었는데 그 와중에도 피난민들은 들짐승 잔해에 독수리 몰리듯 서로가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아귀다툼 하던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 이었다.
이윽고 40여일이 넘는 피난 여정에서 최종 기착지(최종 기착지로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인 지금의 경북 하양시 용촌동이란 작은 마을에 다다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국군이 북진을 시작 할 때 까지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마을은 바로 앞에 금호강이 흐르고 과수원이 많은 인심이 넉넉한 농촌이었다. 우리가 기거하던 집주인도 아주 좋은 분이어서 어른들 생전에는 서로 왕래하며 교분을 이어 갔는데 우리 집에 오셨을 때에는 고마움을 못 잊어 나의 어머니께서 손수 술을 따라드린 유일한 분이기도 하다. 피난 시절 그 해는 유난히도 사과가 풍년이여서 주인 댁 과수원 일을 돌봐 주며 사과를 끼니로 먹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나는 날이 밝으면 형들과 함께 의례히 금호강둑에 앉아 그 치열 했던 영천 지구 전투에 여러 대의 폭격기가 급강하 하여 폭탄을 투하하고 급상승 하는 것을 재미있게 보았는데 이는 며칠이고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양식을 구하기 위해 하양 장에 가셨다가 찢어진 호외 신문을 가지고 오셔서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신다. 나는 아버지께서 그처럼 흥분하시며 기뻐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신문 기사 내용인즉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과 낙동강 전투에서의 반전으로 국군이 북진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어린 탓에 잘 몰랐으나 자라면서 이 사실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3개월여의 지긋지긋한 피난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으나 오는 도중 전쟁으로 희생 된 군인과 민간인의 시신들을 너무 많이 목격 하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여 살아오면서 잊혀 지기를 바라던 기억들이다.
마침내 집에 돌아오게 되었고 후에 학교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게 되어 한동안 놀림을 받았다.

풀 보리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는 6월의 푸른 석양이 싱그럽다. 태고의 평화를 전 해 주는듯한 이 저녁에 60년 전 피난길을 회상 해 보니 감회가 새롭다. 9살 어릴 때의 일이지만 지금도 또렸이 기억이 되는 것은 아마도 그 동안 살아오면서 늘 화제가 되었기에 잊혀 질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