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부가 꿈꿨던 파랑새 둥지에 시집와 새 삶을 일구다
2009-08-13 최동철 편집위원
-정종구, 지영옥씨 부부
망국의 한을 안고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집단 이주당하며 차별과 서러움을 이겨내고 살아야했던 ‘까레스키’(고려인) 증조할아버지가 늘 꿈꾸어 왔던 파랑새 둥지에 증손녀가 새 삶을 일군 것이다. ※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역사를 살펴보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연해주에 살던 망국인들은 ‘일본제국주의를 위한 간첩행위와 이의 위험성 대비’라는 1937년 소련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우즈베크 공화국 타쉬켄트, 호레즘, 나만간 등지의 개간되지 않은 허허벌판으로 7만4천5백만 명이 강제이주 당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우리 민족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역경을 견디어내며 휴경지와 갈대밭을 개간, 밭을 만들고 강줄기를 끌어와 논을 만들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고 벼를 심고 목화를 심기 시작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목화 생산량은 세계 4위다. 영옥씨는 이토록 나라 없는 설움 속에서도 강인하게 살아남은 까레스키 4세다.
#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4세 지영옥씨
영옥씨의 남편 종구씨는 형제자매 5남2녀 중 둘째다.
이들 부부의 집은 산외면 길탕리에 있다. 시어머니 송금룡(75)씨가 56년 전, 꽃다운 19살에 보은읍 중동리에서 산골 중의 산골짜기, 길도 좁아 신부를 태운 꽃가마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는 바로 그 시집이다.
그리고 이 시집에서 3년간 4대가 한 지붕 아래서 살았다. 영옥씨의 시어머니의 시어머니인 박순임(95)씨도 아직 건재하다.
그런데 3년 전, 영옥씨의 시어머니가 그들 부부를 집밖으로 내쫓았다. 같은 동네 안이기는 했다. 이유도 간단했다. 종구씨와 영옥씨는 결혼 6년 된 금슬 좋은 부부인데 아직 아이가 없다.
“시할머니 뒤치다꺼리 하랴, 시어머니 수발하랴 식구가 많아 신경을 많이 쓰고 또 시할머니가 예민하여 밤에도 신경을 써야 함으로 아기가 생기지 않는 것 같아 내보낸 것”이라고 속 깊은 시어머니가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그러면 그렇지. 심지어 멀리 외국에서 비행기 타고 산골짜기까지 시집온 며느리에게 어떻게 시집살이를 시킬 수 있겠느냐는 게 시어머니의 한결같은 논리다.
시집살이 3년 만에 며느리 쫓아낸 생각 깊은 시어머니
현명한 시어머니 덕에 시집살이를 조기 면제받은 영옥씨는 결혼 후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친정을 두 차례 다녀왔다.
24세가 되는 해에 주민등록증을 갱신해야 하는 우즈베키스탄의 법률에 따라 2005년 다녀왔고, 2007년에는 초상이 있어 다녀왔다.
인천국제공항에서 타쉬켄트 국제공항까지 직항로인 비행기를 타고 8시간을 간 뒤, 택시를 타면 1시간 30분 정도 지점에 산은 보이지 않고 평야만 있는 고려인들의 집단 공동체 꼴호즈가 있다. 물론 개혁개방이후 농촌 꼴호즈는 해체됐다.
※ 농업중심인 중앙아시아 사회의 핵심적인 제도인 꼴호즈 체제(집단농장)는 규모에 따라 차이는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생산, 행정, 교육, 문화시설을 갖춘 하나의 생활공동체로 구성되었다. 꼴호즈의 해체로 인해 고려인들이 닦아놓은 생활터전기반이 붕괴되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친정에는 아버지 지예어니(55), 어머니 병나리사(54)씨가 소규모의 트랙터 등 농기계 수리 점을 운영한다. 결혼 한 언니와 여동생, 남동생이 각 1명 있다. 언니 부부는 지금 한국에 입국해 이것저것 일을 한다. 남편이 선뜻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 님의 사랑을 굳건히 믿는 금슬 좋은 부부
영옥씨가 남편 종구 씨의 어깨를 마사지해주고, 시어머니는 그런 아들 부부를 귀여운 듯 보고 있는 모습(사진참조)을 보노라면 주위 사람들조차 행복감이 느껴진다. 금슬이 좋아 보인다.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여행 삼아 우즈베크 처갓집을 모시고 가고 싶은 게 바람”이라고 종구 씨가 말했다. 어쩜 그 여행은 맘 편히 아이를 가져보라고 며느리를 내보낸 시어머니의 바람이 이루어지고 나면 성사되지 않을까 싶다. 분명 그 때가 되면 할머니, 아들부부, 손자 3대가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에 있는 영옥씨의 친정집을 방문하게 될 것이다.
참, 영옥씨는 요리를 대단히 잘한다. 시어머니가 ‘눈썰미가 있어, 보기만 하면 맛있게 척척 해 낸다“고 인정한 솜씨다. 뿐만 아니다. 전주에서 열린 전국요리대회에도 출전한 적도 있다. 그래서 요리사 자격증을 따고 싶은 소망이 있다. 그러나 필기시험이 영옥씨에게는 너무 어렵다.
또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한국의 식사 방식은 대화없이 음식을 빨리빨리 먹고 얼른 자리를 일어나는데 반해 우즈베크는 정반대다. 말도 잘 안 통하던 신혼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식사를 끝내고 일어나려 하는데 며느리가 좀 더 앉아있어 달라고 계속 보채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의미를 몰라 ‘얘가 왜 이러나’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알아본 즉 며느리가 우즈베크 식으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려 하는데 식사에 참여했던 가족 대부분이 말도 없이 빨리 음식을 먹은 뒤, 숟가락을 내려놓고 후다닥 식탁을 떠나니 ‘자신을 싫어하는 줄 오해했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나중엔 음식문화의 차이였음을 알고 한바탕 온 가족이 웃었다.
글/사진 최동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