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2009-06-04     보은신문

연초록의 물감이 사방으로 번져가는 봄인가 했더니, 찔레꽃의 향기도 계절 속에 사라지고 청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여름의 길목에 들어섰다. 나이 탓일까? 시간이 후딱 지나가는 걸 느낄 수 있다. 한 곳에 머물지 않는 것이 어디 시간뿐일까?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도, 좋아하는 음식도, 생각과 느낌도 보이는 것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주변을 돌아보면 너무도 많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유년시절 온 우주였던 어머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지난 어버이날, 친구는 술과 다과를 준비해 부모님 산소에 갔다고 했다. 모처럼 혼자 찾으니 마음이 편해, 부모님 앞에서 지난시절과 현재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다가 ‘어머니은혜’ 노래까지 하고 돌아 왔다고 했다. 그 친구는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어머니의 이야기를 자주하고 그때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이렇듯 나이를 떠나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있다. 비록 사는 곳이 달라도, 아주 우리 곁을 떠났다고 해도 늘 마음의 방 하나에는 어머니가 존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은 너무도 많고 크다. 어머니는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는 출산의 고통을 열두 번이나 치루셨다. 그 많은 자식들을 키우면서 산전수전 다 겪으셨고, 그 중 어린자식 둘을 가슴에 묻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어머니는 가난함 속에서도 교육열이 높아 보은에 여중고가 없던 때이지만 큰언니를 보은중학교와 자영고 가사과에, 그리고 둘째언니를 수원으로 유학을 보내는 등 딸들까지 고등교육을 시켰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유달리 많았다. 막내인 난 끝 자식이라고 불쌍해하시며 더 애틋한 사랑을 주셨다. 어머니 연세가 73세 되던 겨울이었다. 천개의 종이학을 접어다 주시며 종이학 천개를 갖고 있으면 한 가지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잘 보관하라고 하셨다. 말씀은 안하셨지만 종이학 하나하나에 딸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정성을 다해 접으셨음을 볼 수 있었고, 천개의 종이학을 접으면서 눈도 침침하고 어깨도 많이 아프셨을 것이다.

그 종이학을 간직한 지 얼마 후, 어머니의 염원이 통하여 나의 가족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 당시 난 둘째아이를 갖고 만삭으로 직장이 멀어 힘겨워 했었는데, 보은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보은으로 발령받던 날 남편은 큰아이와 나를 얼싸안고,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였다. 남편과 나는 지금도 그 날의 감동과 기쁨을 어머니가 가져다주신 것이라 믿고 있다.

그 이후 어머니는 언니와 오빠 네 명에게 각각 천개씩 접어주어 총 오 천개를 접으셨다. 종이학 자체는 하찮을 수 있지만 종이학의 의미에 매달리며 접었던 종이학에서 어머니의 정성과 자식사랑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느낄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을 알면서도 직장과 육아로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갚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시간이 허락하는데 어머니는 떠나 뵐 수 없고 내 마음속에만 계신다.

나의 어머니는 감성적이고 다양한 말을 많이 쓰셨다. 산촌과 바닷가에서 보내셨던 유년시절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잘 들려 주셨고, 아름다운걸 보면 그것에 걸맞게 잘 표현하셨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으셨다. 젊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 둘째언니도 소설속의 주인공 이름으로 첫 자를 따서 지었다고 했다. 내 기억속에서도 겨울밤이면 돋보기를 쓰시고 대하소설부터 문학전집을 읽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나 역시 어머니를 그대로 닮아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게 되었던 것 같다.

나를 존재하게 한분, 나의 어머니! 어머니의 은혜로 내가 있는 것인데 난 평탄하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잊고 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어머니를 찾게 된다. 이런 이기심까지 어머니는 날 사랑하실 것이다. 희끗 희끗해진 머리칼만큼 나이를 먹고, 내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순간순간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음을 본다.
/송원자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