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의 首長이 된 회인면 중앙리 시골소년

조 중 연 제51대 대한축구협회장

2009-02-20     박상범 기자

보은출신 인사인 조중연(63)씨가 제51대 대한축구협회장에 올랐다. 어린 나이인 12살에 고향을 떠났던 시골소년이 50여년이 흘러 7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축구협회의 수장이 되어 산하 7개 축구연맹, 16개 시도축구협회와 함께 한국축구의 앞날을 밝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성공한 그의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추억, 축구선수 및 지도자시절 이야기, 한국축구의 앞날 등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지난 6일 서울 종로에 위치한 대한축구협회 축구회관을 찾았다.

#신인가수, 대형가수에 이어 무대에 오르다
축구회관 문을 열고 들어간 시각이 아침 7시50분, 조회장은 이미 출근을 하여 홍보국원 몇 명과 한참 대화에 빠져 있었다.

바로 전날인 5일에 취임식을 치렀지만 축구발전을 위한 그의 노력은 이미 시작된 듯했다.
6층에 위치한 10평 정도의 아담한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 취임 축하문구가 적혀있는 최상열 보은군축구협회장의 축하난이 눈에 들어왔다.

“축구협회장이 됐다고 고향에서 난도 보내주시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집무실내에 놓여있는 수십 개의 축하난 중 고향에서 보낸 축하난이 맨 앞줄에 나와 있었다.
조회장의 고향에 대한 마음이 느껴진다.

취임소감에 대해 조회장은 “조용필이라는 대형가수 뒤에 오르는 가수는 박수받기가 쉽지 않다. 정몽준 회장이라는 걸출한 인물 후임이라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고 운을 뗏다.

그러나 협회창립이래 축구인 출신으로는 첫 회장에 오른 조 회장은 축구에 관한 모든 일을 거쳤을 정도로 축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축구계 인사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기억하고 있듯이 1989년부터 KBS축구해설위원으로 9년간 마이크를 잡은 적이 있는 조회장은 1992년 이사 및 기술위원으로 축구협회에 몸담기 시작해 1998년 기술위원장 및 전무, 2004년부터는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축구행정가로서 경력을 쌓았다.

또한 2002년 한·일 월드컵 실무책임자로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고 파주 NFC 건립,월드컵 4강 태극전사들의 군 문제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주위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양조장집 손자, 공부대신 축구에 빠지다
회인과 회남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던 부잣집 손자로 태어난 조회장은 보성전문(현 고려대)출신인 할아버지, 서울상대 출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회인초 5학년때 일찍이 공부를 위해 상경했다.

외갓집에 와있었던 그는 객지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중3때부터 축구에 빠지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고등학교였던 경기고 진학을 원했던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지만, 그의 축구에 대한 열정과 고집은 아버지도 꺾지 못했다.

또한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의 많은 빚보증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면서 축구에서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요인이 됐다.

“양조장하시던 할아버지, 식산은행에 다니시던 5대독자 아버지 덕분에 잘 살았으나,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가세가 기울게 됐다. 솔직히 집안이 방 한칸 마련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울었고 축구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해내고 마는 성격인 조회장은 당시 축구에 전념을 했고, 비교적 늦은 나이에 축구를 시작했지만 축구선수로 성공도 거두었다.

축구명문 중동고 3학년때 청소년대표에 뽑히면서 태극마크를 달게 된 조회장은 고려대에 진학하게 되었고, 이후 해병대와 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이후 1973년 고려대 코치를 시작으로 울산현대 코치, 울산현대 감독, 중동고 감독 등을 맡으면서 많은 우승을 일구어 냈다.

“고려대 코치시절 당시 3학년이던 차범근 선수와 1학년이던 박성화 선수가 주축이 되어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도 맛봤다. 또한 선배들의 부탁으로 프로팀인 울산현대의 창단의 산파역할도 했었다”면서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조회장은 “스타출신이 아니면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기회만 되면 축구계에서 도망쳐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면서 선수출신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아쉬운 마음도 터놓았다.

 
#배추벌레 잡고, 회인천에서 미역감고
1946년 1월에 회인면 중앙리에서 태어난 조회장은 양조장을 하던 할아버님(조석부)과 식산은행(현 한국산업은행)에 다니던 아버님(조남대)의 덕분으로 부유하게 살았다.

비록 회인초등학교 5학년때 서울로 전학을 갔지만, 조회장은 어린 시절 회인에서의 추억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2천평이 넘었던 집터 덕분에 할아버지와 함께 종종 풀을 뽑았었고 배추밭에서 배추벌레를 잡았으며, 여름에는 회인초 동기인 홍장표(용인대 교수) 등 친구들과 함께 맑디맑은 회인천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놀았던 기억들.

“어릴 적 할아버지 집은 어마어마하게 크게 느껴졌다. 집터가 2천평이 넘었고 대문 3개를 지나야 집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풀뽑던 기억, 배추밭에서 배추벌레 잡았던 기억, 사냥을 다니던 기억들이 새롭다”

나이가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일까?
이제는 회인에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1년에 2회 정도는 회인을 들려 본다.

지난해 12월에도 부인 박현숙(61)씨와 함께 회인에 들려 어릴 적 살던 집과 양조장을 둘러보고 마을선배인 이노적씨를 찾아뵈면서 추억을 회상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조회장은 “고향 회인이 많이 쇠락했다. 고향에 대한 추억이 남지 않아도 좋으니, 회인이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며 “외부의 문물은 빨리 많이 들어왔지만, 생산을 유발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야 했는데...”라며 쇠퇴해져 가는 고향에 대한 아쉬움을 말했다.

#보은축구의 발전은 학교축구팀이 있어야
보은의 축구인프라에 대한 기자의 자세한 설명은 들은 조회장은 지역 축구팀 육성을 강조했다.
“협회차원의 지원에 앞서 선결과제로 지역에 축구팀이 있어야 한다. 인프라만 구축됐다고 해서 대회나 전지훈련을 유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정식팀이 아니더라도 동아리팀이라도 있어야 한다”

연습상대를 할 축구팀이 지역에 있어야 외부에서 전지훈련도 오고 전국단위 축구대회 유치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린이축구교실 등을 운영하면 협회에서 지원할 수 있음도 언급했다.
조회장은 “해마다 2월에 전남 강진에서 전국 140개 팀이 참가하는 대회와 여름에는 경주에서 전국 300개팀이 참가하는 유소년축구대회가 열린다. 강진군과 경주시가 3억여원을 투자해 대회를 유치하는데, 경제적 파급효과가 어마어마하다”면서 보은군에서도 학교축구팀이 구성되고 인프라가 보완되어 축구로 인한 경제적 이익창출이 되기를 바랐다.
몸은 비록 고향을 떠났어도 고향을 아끼고 발전을 바라는 마음은 보은에 남아있는 듯 했다.

#취재를 끝내고…
예정시간을 넘겨 진행된 인터뷰에도, 찾아온 손님을 옆방에서 기다리게 하는 실례에도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하는 따뜻함을 지닌 조회장.
그의 따뜻한 마음이 고향을 향해서도 계속 되기를 바라며, 그의 희망대로 2018, 2022년 월드컵이 대한민국에 유치되는 쾌거를 올리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