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남촌목장 양병철 대표

2009-01-23     박상범 기자

낙농으로 성공한 남촌목장 양병철(50, 산외면 중티리)대표를 만나기 위해 목장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군도 8호선에서도 약 700m 떨어진 외딴 곳으로 더욱이 목장에서 300m구간은 비포장길로 작은 안내판에 의지해 겨우 찾았다.
양 대표의 자택을 들어섰을 때, 그는 월간 낙농 2009년 1월호와 낙농육우지를 보고 있었다.  오후 3시 쉬는 시간임에도 부지런히 낙농정보를 습득하는 모습에서 성공비결은 별다른 것이 아닌 부지런함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87년 농어민후계자로 농사일 시작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일찌감치 생업에 나서야 했던 양병철 대표는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조부모을 모셔야 하는 상황이 되자, 미련없이 직장을 접고 고향인 회남면 남대문리로 돌아온 것이 1987년이다.

농어민후계자가 된 양 대표가 처음 시작한 농사일은 한우 30두를 키우는 것이었다. 1989년까지 한우를 키우다가 소장사꾼들의 농간으로 3년만에 낙농으로 전업을 결심했다.

“당시에는 소장사꾼들의 농간이 무척 심했던 시절이었다. 비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로조합장이었던 현 이향래 군수의 권유로 낙농을 시작하게 됐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낙농을 시작한 양 대표는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에 18∼20시간을 일을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커가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달라지게 됐고, 이거 아니면 가족 모두가 죽는다는 심정으로 정말 부지런히 일을 했다”

이런 노력이 바탕이 되어 1998년 1,000ℓ, 2001년 2,000ℓ를 돌파하였으며, 2002년경 우유파동으로 농가별 할당제가 되면서 현재는 매일 1,800여ℓ를 생산하고 있다.

2005년 1월 산외면 중티리 현 목장으로 옮겨 7천평의 목장에서 착유우 60두, 육성건우 70두, 비육우 50두 등 총 180여두의 젖소를 키울 정도로 보은에서 낙농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농민이 된 것이다.

#어려운 여건들, 부지런함으로 극복
보은의 대표적인 낙농가로 성공한 양병철 대표는 부지런함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우선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각종 교육과 세미나에 부지런히 참석했다.

“사료회사 세미나, 낙농육우협회 세미나와 농업기술원과 기술센터의 교육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특히 사료·질병·경영컨설팅 전문가의 조언을 듣는 것이 성공의 밑바탕이 됐다”며 “목장일에도 부지런해야 하지만, 교육과 세미나 등에서 낙농관련 정보를 얻는 것에도 부지런해야 한다”고 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또한 그는 낙농성공을 위해 검정회 활동을 강조했다. 종축개량협회 청주검정회장인 양 대표는 “검정회에서 실시하는 검사활동으로 인해 최상급 우유의 질을 유지할 수 있고, 착유우의 사양 및 질병관리가 지속적으로 가능해 낙농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낙농이 사료값 폭등으로 인해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 2007년 낙우회원들이 출자하여 보은읍 학림리에 건축한 섬유질사료제조시설(TMR)이 생산비 절감에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양 대표는 자가조사료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옥수수재배를 지난해 3천평에서 확대할 계획을 준비 중이다. 이렇게 20년간 한우물만 파고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2002년 (사)한국종축개량협회가 주는 10,000㎏ 인정증서(1마리의 305일 생산량)를 시작으로 7년간 10,000∼11,000㎏ 인정증서를 받았으며, 2008년 12월에는 전국베스트 농가에서 선정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아버지의 성공, 아들이 이어가
“낙농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다.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면 된다”라는 신념으로 보은군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성공한 그에게 또 하나 성공해야 할 일이 생겼다. 다름 아닌 양 대표의 큰 아들 형열(21)씨가 그의 목장을 물려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2007년 12월 20년간 낙농일을 함께 해온 부인 민병희(46)씨의 허리디스크 수술로 인해 원하던 대학입학에 실패하고 재수를 준비 중이던 큰 아들 형열씨를 불러 내렸다.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형열씨는 시골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재수를 해야 하는 입장으로 망설였지만, 집안사정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2008년초부터 아버지를 도와 온 형열씨는 당초 우려와는 달리 시골생활과 목장일에 잘 적응을 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서울에서 커서 시골에 잘 적응할까, 힘든 목장일은 잘 이겨낼까, 사실 많은 걱정을 했지만, 쉽게 잘 적응을 하고 오히려 요령껏 목장일을 아주 잘 하고 있다”라며 양 대표는 낙농 선배로써 아들을 칭찬했다.

아들 형열씨는 “원하는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할 바에는 낙농으로 성공하신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올해 한국농업대학 낙농학과에 진학하게 됐는데,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낙농전문경영인으로 성공하고 싶다”고 낙농에 대한 계기와 포부를 밝혔다.

현재의 위치에서 안착하려던 양 대표는 이렇게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아들을 위해 생각이 바뀌었다. “최신 자동화시설 확충, 자가 사료부지 확대, 로봇착유기 구입 등을 구비하여 나 보다는 편안한 여건에서 목장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라며 애틋한 자식사랑을 말했다.

아들을 위해 이런 계획을 밝힌 그 이지만, “일을 잘못하는 것은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게으른 것은 용서할 수 없다”라고 아들에게 충고를 한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그 다운 충고다.

오후 4시가 되자, 1월 둘째주 검사성적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부자는 180여두 젖소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선다.

아버지의 성공을 이어가려는 아들, 아들의 성공을 위해 또 다른 준비를 하는 아버지.

사료저장고와 축사를 오가며 함께 사료를 나르는 부자(父子)의 모습에서 최고의 낙농경영인을 향한 두 사람의 동행이 산마루에 걸려있는 햇살만큼 따스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