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좋아 마을이름도 수정리
보은읍 수정리 … 153
아침부터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뿌연 안개가 온통 파랬던 하늘을 감싸 안아버렸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아침 안개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물이 참 좋은 보은읍 수정리를 찾은 것은 25일. 초겨울 가뭄에 목말라 있던 산과 들에 달콤한 빗방울이 흩날리던 바로 그날이었다.
상수도 공사로 파헤쳐진 마을 입구를 피해 빙 둘러 도착한 마을 광장에는 비가 잠시 멈춘 틈을 타 마실 나온 주민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올해 75세의 김재분씨와 72세의 표점순 할머니다.
#인심 좋고, 교통 좋은 마을
마을 자랑 좀 해 달라고 부탁을 드리자 김재분 할머니가 먼저 나섰다.
인심 좋고, 공기 좋고 다 좋다고 말을 꺼낸 할머니는 무엇보다 읍내가 가까워서 참 좋단다.
“한 20분 남짓 될까? 택시를 타기도 그렇고, 버스를 타기도 그래서 그냥 걸어서 다녀. 교통비도 절약되고, 운동도 되니 좀 좋아?”
혈압약도 타러 가야하고,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도 가야하는 농촌 노인들의 삶에서 읍내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장점이자 자랑거리가 되는 셈이다.
수정리의 자랑은 단지 읍에서 가깝다는데에만 있지 않다.
표점순 할머니는 어느 마을보다 인심이 좋고, 주민들의 단합이 좋다고 자랑한다.
“여름철에는 마을 가운데에 있는 정자에서 함께 지내고, 겨울에는 따뜻한 경로당에서 놀고. 점심은 물론 재미있을 때는 저녁까지도 같이 먹을 때가 많아.”
마을 노인을 중심으로 이렇게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것은 바로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표점순 할머니는 말한다.
옛부터 물이 좋아 수정리(水井里)라고 불렸던 마을의 내력이 주민들의 건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이 좋은 마을 수정리
지금은 수정천 정비사업을 통해 복개됐지만 안 수정 마을 주차장 가운데에는 우물터가 있었다. 이 우물과 연결된 하천을 따라 빨래터가 위치해 있었고, 이 빨래터는 한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유익하게 사용했던 곳이다.
우물터와 함께 수정리 마을 곳곳에서 물과 관련된 의미있는 장소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수정리 2반 입구 바깥 수정에는 옻샘이 위치해 있다.
과거 산에서 나무를 하던 주민들이 옻에 오를 경우 이 옻샘을 떠 먹고, 씻으면 다 낳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또한 피부병에 걸렸을 때에도 이 샘의 물을 먹고, 바르면 치유됐다고 전해지고, 물이 워낙 차가워 여름철 땀띠에 고생하던 주민들도 이 샘물에 의지했다고.
옻샘과 함께 약물샘 등 마을에는 크고 작은 3개의 샘이 있어 수정리라는 지명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지명이 아름다운 마을
수정리는 마을 한 가운데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와 두 마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등성이를 중심으로 보은읍과 가까운 북쪽마을이 안수정(내 수정)이라고 했고, 남쪽마을을 바깥수정(외 수정)이라고 부른다.
또 내수정 입구를 염송골, 보은고등학교 뒤쪽을 귀경골이라고 불러 수정리는 모두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지역에 4개의 자연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수정리는 마을 곳곳에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들이 참 많다.
내 수정 위쪽은 웃골, 외 수정 위쪽은 작은 웃골이라 불렀고, 외 수정 앞에 위치한 야산은 순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보은고등학교 뒤쪽으로 나 있는 마을 진입로를 타고 올라오다 보면 약간 경사진 언덕을 지나야 하는데 이곳을 방고개라 불렀고, 외 수정마을 입구는 동구밖, 외 수정 남쪽 솔밭산은 잔대 너머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여졌다.
마을 곳곳에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이 붙여진 수정리지만 마을 주민들이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곳은 바로 마을의 상징인 왕재봉이다.
#마을의 상징 왕재봉
70년대와 80년대, 한창 새마을운동이 곳곳에서 펼쳐지던 그때였다.
수정리 주민들은 마을의 상징인 왕재봉을 가사에 담아 마을 노래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2, 30년 전만 해도 마을주민 모두 이 노래를 부르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마을의 상징이 되었던 왕재봉은 이제 보은군민들의 사랑을 받는 산이 되었다.
보은읍 남산에 위치한 충혼탑에서부터 왕재봉까지 잘 닦인 등산로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왕재봉을 찾게 된 것이다.
매일 아침, 수정리 주민들은 왕재봉 정상에서 외치는 보은 군민들의 ‘야∼호’ 소리에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고.
#수정리 마을은?
현재 수정리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은 모두 72세대, 180여명이다.
마을의 중심인 내수정에 51세대, 13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외수정에는 21세대 5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지금은 200명이 채 안 되는 주민이 살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곳 수정리에는 500여명의 주민들이 살던 큰 마을이었다.
수정리 마을에는 마을 주민뿐 아니라 보은군민 모두의 추억이 담긴 의미 있는 장소가 있다.
바로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다.
외수정 남쪽으로 면천 박씨 박삼길의 묘가 있고, 묘소 주변으로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빼곡이 들어서 있다.
2004년, 폭설피해로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예전의 그 울창하던 소나무 숲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초, 중, 고등학생들의 소풍장소로 많이 이용되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