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면 판장1리(149)

수몰의 아픔 간직한 작은 마을마을

2008-10-17     류영우 기자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571번 지방도에서 벗어나 옥천군 안내면으로 향하는 502번 지방도를 따라 대청호를 끼고 한참을 달리자, 판장1리를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석재를 이용해 멋지게 마을 입구를 표시해 놓은 것도 아니다. 수변구역이라는 안내 표지판 옆에 자그마하게 내 걸린 마을 이정표가 낯설다. 마을 안길도 익숙하지가 않다. 차 한대가 간신히 지나갈 좁은 길이 가파르게 이어져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작은 시골마을과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찬찬히 살펴본 마을의 모습은 마을에 들어섰던 첫 인상을 너그럽게 감싸 안을 만큼 포근하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마을 뒷산이 그랬고, 따뜻하게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모습도 한가롭다.



#7가구, 11명의 주민이 전부
예전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현재 판장1리에 살고 있는 주민은 딱 7가구다.
그나마 박동석(87)씨 부부는 겨울이 되면 아들네로 돌아가야 하고, 문정분(여, 74)씨와 민남기씨는 대전과 판장1리를 오가고 있다.
11명의 주민 중 4명을 제외한 7명이 판장1리 토박이 주민인 셈이다.
최영한(74) 이장 부부와 최병천씨 부부,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 전남석(여)씨, 그리고 올해 98세로 며느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오수월씨가 주민의 전부다.
그나마 판장1리에서 태어나 생활한 주민은 단 한 명도 없다.
최영한 이장부부는 90년, 서울에서 판장1리로 귀농을 했고,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 전남석씨 또한 97년에 대전에서 귀농을 했다.
최병천씨 부부는 회인면이 고향이지만 서울에서 생활하다 판장1리로 다시 귀농했다.


#흉물로 남은 폐가들
마을자랑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푸념부터 털어놓는다.
“우리가 한 얘기, 다 쓸 수 있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바짝 긴장이 된다.
먼저, 전남석씨가 교통편에 대해 말을 던졌다.
"버스를 타려면 고개 너머까지 걸어가야 돼요. 분저리까지만이라도 버스가 왔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최영한 이장의 부인인 구제순씨가 “아, 옛날에는 어부동까지 걸어가서 탔는데 뭘. 버스 편보다는 폐가 정리가 우선이지.”라며 마을의 흉물로 남아 있는 폐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판장1리에는 현재 3채의 폐가가 있어요. 그런데 이 폐가들이 마을 입구에 자리 잡고 있어 마을의 이미지를 다 해치고 있습니다. 외지인들이 이곳에 쓰레기까지 버리다 보니 이제는 쓰레기장이 되어 버렸지요. 얼마 전에는 싱크대까지 버리고 간 사람도 있었다니까요?”
마을의 흉물로 남아있지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쉽지 않다.
철거비용으로 50만원씩 지원해 준다고 하지만 이 금액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철거비용이 마련된다고 해도 땅주인과 집주인이 달라 철거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농사짓기도 힘든 상황
판장1리의 주 소득원은 복숭아다.
하지만 판장1리에서 자라고 있는 복숭아 나무는 300주가 채 되지 않는다.
최영한 이장이 120주, 전남석씨가 120주, 그리고 최병천씨가 40주를 키우고 있어 판장1리에서 자라고 있는 복숭아 나무는 모두 280주에 불과하다.
마을의 최고 고소득 작목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을 사서 농사를 지을 형편은 못되고, 일당정도 버는 수준이란다.
복숭아 농사 외에 들깨, 고추 등 밭농사를 조금 짓고는 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도로변에 위치해 있어 대청호를 찾는 낚시꾼들에게 이들이 짓는 농사는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다고.
“언젠가는 마을 앞 감나무 밑에서 봉고차까지 대 놓고 감을 따가더라고요. 그래서 ‘왜 감을 함부로 따가냐’고 물었더니, ‘감 주인이 따라고 하고, 잠깐 어딜 갔다’고 하더라고요. 감나무 주인이 물어 보는 데도 말이에요.”
도로변에 심어놓은 배추는 속이 차기 전에 모두 뽑아가는 상황에서 마을 주민들은 도로변에 땅이 있어도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어려운 상황속에서 주민들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바로 잃어버린 마을 지명을 되찾는 일이다.
판장리의 본래 이름은 늘개미였다.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길게 늘어서 널처럼 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늘개미는 판장리로 변해버렸다.
최영한 이장은 “늘개미라는 정겹고 아름다운 마을 지명을 두고 일제시대때부터 마을이름이 판장리로 바뀌어 부르게 됐다. 판장리는 널빤지 판(板)에 장사지낼 장(葬)자를 쓴다. 결국 관을 덮는 널빤지가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라며 “옛 마을지명을 되찾기 전, 도로를 중심으로 새로 바뀌는 주소에는 늘개미란 지명을 쓰도록 했다”라고 말했다.
희망을 찾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은 계속됐다.
바로 마을에 태양광 발전소를 짓겠다는 꿈을 갖게 된 것이다.
“마을 중심에 환경청 소유의 땅이 있어요. 이곳에 태양광 발전소를 설치할 수 있도록 건의해 나갈 생각입니다. 우리마을은 산 밑에 위치해 있어도 서쪽으로 확 트여있어 일조량이 좋습니다. 태양광발전소가 설치되면 주민들의 전기세 부담은 물론 전기를 팔아 수익도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7가구, 11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판장1리 주민들의 노력은 마을을 풍성하게 채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