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에 능했던 김덕민 선생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리지역 옛 이야기 열한번째
어려서, 할머니 무릎에 누워 듣는 옛날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신바람 해피통신이 잊혀져 가는 옛 추억을 되새기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 주는 우리 지역 옛 이야기’는 우리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나 문화재, 그리고 지역을 빛낸 인물들에 대해 소개할까 합니다. 구수한 우리 지역의 옛 이야기들도 이제는 점점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들려주었던 우리 지역 옛 이야기들을 지면에 충실히 담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김덕민 선생의 자는 방량이고 경주김씨이다. 1570년 선조 3년에 노성현감 가기의 아들로 보은읍 종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학문을 좋아했고, 중봉 조헌문하에서 수학했다.
선생은 생각이 깊고 행동이 엄숙했으며 문장 또한 뛰어났다. 항상 예의에 어긋남이 없도록 했고, 노비들에게도 은혜와 위엄을 갖추어 부렸다.
벼슬살이를 할 때는 근검하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했다.
선생은 국상 중에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밥상에 쇠고기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수저를 들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정도로 근엄한 천성을 가졌다.
1592년 선조 25년 왜적이 침약하고 스승인 조헌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23세였던 선생은 아버지께 “부모님의 은혜가 크고 깊지만 충성스러운 스승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자가 독자로 부모님을 모실 사람이 없지만 집안 친척을 믿고 의병에 참가하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여 의병에 참가했다.
그러나 스승인 조헌은 김덕민 선생을 타이르기를 “너는 형제자매도 없는 외아들이요, 어늬 숙부가 또 의병에 참가하고 있으니 너는 돌아가 부모를 봉양함이 옳다”며 의병 참가를 거절하자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1606년 선조 3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용궁현령이 되고, 이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 임금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적당한 인물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되자 조정은 선생을 추천하니 임금이 친히 불러 보신 후 “나는 그대의 모친이 늙었음을 알고 있다. 아와 조정대신들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그대를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마땅치 않음을 알고 있으나 이번 사신의 업무가 중요한지라 부득이 그대를 보내며 그대의 늙은 어머니는 대신 편히 지내도록 돌볼 것이니 안심하고 다녀오라”하며 의복과 금화 등을 하사했다.
선생은 집으로 돌아와 이 말씀을 드리니 어머니께서는 “사신의 일은 나라의 큰 일이니 너의 온 정성과 힘을 다하여 임무를 다하고 오라. 내 죽는다 해도 이는 사사로운 정이니 구애치 말고 충성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해라”라고 당부했다.
선생은 육로와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떠났다. 바다를 건널때는 풍랑이 심하여 배안의 모든 사람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지만 선생은 태연자약하며 임금의 명령을 완수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늘에 빌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일본에 간지 8개월만에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일본의 국내 형편과 역사, 그리고 지리 등을 샅샅이 살피고 돌아오니 임금이 가까이 불러 “그대가 아니었다면 누가 이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 왔겠는가. 그대 어머니도 무사하니 나는 매우 기쁘다”하시며 특별히 큰 잔치를 베풀어 선생의 노고를 위로했다.
1661년 효종 2년, 음력 12월 10일 선생은 82세의 일기로 별세하니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서됐다.
이흥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