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천이 부귀보다 좋다던 김광 선생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리지역 옛 이야기-열번째

2008-04-18     보은신문

이조시대 수많은 사화가 있었지만 그 꾀함이 음흉하고 처형이 참혹하기는 기묘사화가 제일이었고, 기묘사화에 처형된 어진 사람 중 가장 처절하게 죽은 사람이 바로 지위가 가장 높았던 충암 김정 선생이었다.

충암의 형이 광이니 자를 회실이라 하고 호를 장암이라 했다. 김광 선생은 1482년 성종 13년 정인 효정의 아들로 보은읍 성족리에서 태어났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글자를 알았고, 놀 때는 사양하는 예도 알았다. 여덟 살이 되어서는 경서와 사기를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13살에는 증자의 하루 세 번 반성할 것과 인자의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는 글을 책상위에 써 놓고 스스로 경계하며 성현의 글을 읽었다.

19살이 되던 해에 부친이 죽자 상복을 벗을 때까지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사마사를 거쳐 참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학문이 짧다는 이유로 취임을 하지 않았다.

1506년 중종 원년에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한 공신들이 부당하게도 국모인 신비를 쫓아내려하자 의가 아니라고 배척하는 뜻을 시로써 표현했고, 신비의 복위를 상소하기도 했다.

1519년 중종 14년 사화가 크게 일어 나자 선생은 세상에 뜻을 잃어버리고 물이 양 계곡에 흐르는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좌우에 암자를 세우고 그 암자에 장암이라는 현판을 달고 숨어 버렸다. 장암이란 별호는 이때부터 부르기 시작됐다. 선생은 이곳에서 손수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가꾸며, 한가롭게 책도 읽고 주위를 거닐며 살았다.

1521년 중종 16년, 김광 선생은 사랑하던 아우 충암 김정 선생이 제주도에서 죽음을 당하자 선생은 당질인 응교 천우와 함께 제주도로 가 아우의 시체를 안고 돌아왔다. 제주에서 돌아오는 도중 바다 중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풍랑이 크게 일어나 살길이 어렵게 되었다.

이때 선장이 “옛날부터 관이 배 안에 있으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며 “만일 시체를 싣고 바다를 건너가는 사람이 있으면 말하시오”라며 배 안을 샅샅이 뒤졌다.

이후 시체를 발견하자 선생은 아우의 시체를 끌어안고 슬피 통곡하니 얼마 후에 풍랑이 멈추었다. 그리하여 무사히 육지에 도착했고, 선장은 이상한 일이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선생의 돈독한 우애에 하늘이 감복한 일이었다

그때 선생의 어머니는 76세의 노인으로 작은 아들이 비명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기고 매일을 눈물과 탄식으로 지내자 선생은 “아우가 비록 비명에 갔으나 신하의 도리를 다하였고, 의에 죽은 것이니 공자의 살신성인의 가르침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으니 너무 서러워하지 마십시오”하자 어머니도 슬픔을 참고, 살아가게 됐다.

선생은 항상 아들과 조카들에게 이르기를 “부귀는 좋기는 하나 빈천만 못하다. 부귀는 위험하기 쉽지만 빈천은 욕되지 않다. 욕되지 않음은 위험하지 않고, 위험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다. 마음이 편한 것이 곳 부귀이니 내 자손이 마음을 움직이고, 벼슬을 탐하여 분주스럽게 하여 빈천을 지키지 못한다며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니 너희들은 이 말을 명심하여 삼가라”고 훈계했다.

1545년 인종 원년에 선생은 64세로 별세할 때까지 조정의 득실을 말하지 않고 세인의 잘못을 묻지 않고 조용히 세상을 살다 갔다.

이흥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