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글로리 보은점
시골 문방구에서 문구 전문 브랜드 점으로 다시 서
2007-08-24 송진선
가게를 수리하더라도 일부분 했거나 가게 안에서 금고나 주판 등 선대부터 그 업소를 유지하는데 이용한 물건이 하나, 둘 있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모닝글로리 보은점의 경우 가게를 이전하면서 과거의 모습, 과거를 연상하게 하는 것은 없었다.
다만 아버지 대부터 팔았던 원지를 긁는 철판과 먹지 등이 남아 있었다.
# 명진상사로 출발
대표적 문구 브랜드 중의 하나인 모닝글로리 보은점(대표 박세일) 의 전신인 명진상사를 기억하는 군민들이 많다.
문구 및 사무용품을 취급하는 모닝글로리의 전신인 명진상사는 박세일 대표의 아버지 박희태씨가 운영하다 큰 아들인 박세일씨에게 대물림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닝글로리 사장인 박세일씨까지는 3대를 거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세일씨 아버지가 하기 전에 이미 할아버지가 삼승면 송죽리 지금의 남보은 농협 송죽 분소 자리에서 과자도 팔고 연필과 지우개, 공책 정도를 팔았던 그야말로 점방을 했었다.
그의 아버지가 이 점방을 물려받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문구점을 한 것을 따져보면 3대가 된다.
할아버지가 조그만 문구 점방을 할 때 농산물 중개상을 하던 아버지가 1979년 점포를 얻어 처음 문구업을 시작했던 명진상사의 출발은 초라했다. 5평정도 밖에 안되는 작은 규모에서 시작됐다. 지금의 수정청과 자리다.
당시 보은시내 문구점만 20여개에 달했지만 대부분 과자도 팔고 학용품도 조금 진열해놓고 파는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당시 명진상사는 가게 규모는 5평에 불과했지만 이같은 구멍가게 수준이 아니라 거래 규모는 매우 컸다.
잉크, 연필, 펜촉, 공책, 도화지, 색종이, 스케치북, 크레용(크레파스를 이렇게 불렀다) 등 학생들이 사용하는 문구류에서부터 원지와 등사기, 분필, 칠판 지우개, 각종 서류의 앞 뒤면에 댔던 철판 등 없는 것이 없었는데 그 때 당시 4, 50개에 달했던 초등학교를 비롯해 중학교에도 사무용품을 공급한 문구 거상이었다.
지금은 폐교돼 없어진 마로면 소여초등학교, 적암초등학교, 내속리면 북암초등학교에도 명진상사의 학용품과 사무용품이 공급됐다.
자동화가 된 지금과 달리 인쇄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철판 위에 원지를 대고 송곳같이 끝이 날카로운 것으로 그 원지에 글씨를 일일이 새겼다. 그러면 원지 위에 글씨가 하얗게 파였다.
이것을 등사기 위에 올려놓고 밑에는 지금과 같이 하얀색의 A4용지가 아니라 재활용지인 누런 빛깔의 종이를 놓은 다음 롤러에 잉크를 묻혀 돌리면 원지 밑에 있는 종이에 까만 글씨가 새겨졌었다.
이렇게 원지 하나에 종이만 계속 갈아 끼워 100장이고 200장이고 인쇄를 해서 사용했다.
옛날에는 문서도 이렇게 작성하고 월말고사, 기말고사 등 시험문제도 이렇게 선생님들이 일일이 손으로 글씨를 새겨 출제했다.
그 때 선생님들 팔에는 위, 아래에 고무줄을 넣은 검은색의 토시가 끼워져 있었다.
왜냐하면 원지에 대고 글씨 쓰는 일을 많이 하다보면 소매 끝이 닳고 또 등사기에 잉크를 묻혀 인쇄를 하다보면 잉크가 묻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추억의 한 장면인 이런 시기를 명진상사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80년 수해로 위기 겪어
아버지가 차린 명진상사에서 공급하는 문구 및 사무용품은 품질이 좋아 학교마다 거의 공급돼 매출도 좋았다.
자리를 잡아가나 했는데 80년 수해는 그들에게서 웃음을 빼앗은 악마였다. 문구점은 어른 키의 골반 정도로 물이 차 올랐을 정도로 물바다를 이뤘다.
종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집 방에 쌓아놓았던 물건까지 어느 것 하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없이 모두 쓰레기로 변해버렸다.
당시 자금이 넉넉지 않아 외상으로 대전 도매상에서 물건을 공급받고 외상값을 갚아나가는 식으로 문구점을 운영해왔던 터라 외상값 갚을 일이 캄캄했다.
그러나 앉아서 울 수 만은 없는 노릇. 그동안 신용을 잃지 않고 생활하고 장사를 했던 터라 대전에서 다시 물건을 공급받아 다시 아버지는 재기할 수 있었다.
문구점을 차렸을 때가 박세일 대표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고 수해를 겪은 해가 충북대 건축학과 1학년이었다. 그동안 일이 안 풀려서 고생 고생한 아버지의 모습 등 박세일씨는 혹독한 그 과정을 모두 겪었다.
어렵게 공부하며 중등교사 자격증까지 딴 박세일씨는 당시 대학교 졸업자 초봉이 20만원, 30만원에 불과했는데 명진상사의 한달 매출이 이보다 훨씬 많았던 이유도 있고 나가는 것보다 명진상사를 이어가길 바랐던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를 돕기 위해 나갈 생각을 접고 아버지 밑에 부대표로 눌러 앉았다.
그리고 93년 아버지 명의에서 아들 박세일씨로 명진상사 사업을 물려받은 후 좁아터진(?) 공간이었지만 그곳에는 문구에 관해서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지역에서 요구하는 문구 및 사무용품을 구비해놓았다.
그러나 그가 문구점을 물려받은 후 자녀교육을 이유로 보은을 떠나는 인구가 많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문구업계가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1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문을 열었을 정도로 성실함으로 버텨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갔다.
# 문구도 메이커 시대
문구도 메이커화 되고 있는 추세이고 시골 문방구의 이미지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진 박세일씨는 보은에도 문구전문 브랜드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2000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며 모닝글로리 보은점을 개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문구점도 5평에서 20평으로 늘렸다. 명진싱사가 일대 진화한 것이다.
다소 가격이 높아 처음에는 보은에서 잘 먹히지 않아 다소 고전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차차 고객이 늘고 또 명진상사를 이용하던 단골 고객들이 끊이지 않아 제자리를 잡아갔다.
여기에 문구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긴 시점이 청원∼상주간 고속도로 공사 발주시기와 맞물려 3공구부터 6공구까지 보은구간 전 시공사에서 모닝글로리 보은점의 문구제품을 대놓고 사용한 것도 초기 안착에 크게 도움이 됐다.
박대표는 “기존 수정청과 자리에서 계속 명진상사로 문구업을 했다면 아마도 이같은 호기는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박 대표는 또 “현재 고속도로 공사가 거의 마무리 돼 많은 하청업체들이 속속 보은을 떠나는 등 시공사에서도 일거리가 줄어 문구 및 사무용품 매출이 전과 같지는 않아 걱정이 되지만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말이 있듯이 하수처리공사 등 지역에 각종 건설공사가 이어지면서 이들 회사들에 문구를 대주게 돼 그럭저럭 유지가 된다”고 말했다.
# 전공 활용해야 하는데
삼산초등학교 앞 터주대감 중의 한 곳으로 늘 문구점을 지키는 박대표 부부는 교사 못지 않게 학생들로부터 인사를 받는다. 갖고 싶은 것이 다 있는 문구점 주인인 그들이 어린이들에게 우상일 정도다.
아버지와 함께 한 것을 포함해 28년 동안 문구업을 했으니 그만큼 단골도 많다. 초등학생이던 어린이가 커서 대학생이 돼서 찾아오기도 하고 어머니, 아버지일 때 문구점을 찾던 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돼서 손자들과 함께 와서 색종이며, 풀 등 문구를 사주기도 한다.
대학 전공을 살릴까 고민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문구업을 활성화시킬까 몰두하는 박대표는 이젠 문구업도 실무를 익힌 전공이 됐다고 말한다.
그동안 건축학을 전공하고 중등교사 자격증까지 취득한 박세일씨는 성인이 된 후 2번의 기회를 실기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한 번은 대학교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지 않은 일이고 또 한 번은 34살 무렵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사립고등학교 교사 응모를 포기한 것이다.
당시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지 않고 초봉 20, 30만원의 월급생활을 했거나 대학 졸업 후 바로 교직에 들어간 친구들이 10년 가까이 교사 생활을 해 직급이 높았지만 34살 때 교사로 나갔다면 지금 나이에 훨씬 더 나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 그러나 박세일 대표는 사는 동안 3번의 기회가 온다는 것이 맞는다면 1번의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고 보고 그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살리겠다는 생각이다.
전공을 살려 건축관련 일을 하는 것과 현재의 문구점을 확장해 문구타운을 조성하는 일이다. 언젠가는 이 꿈을 이루겠다는 것.
아마도 모닝글로리 보은점 간판에 아버지의 위업인 명진상사 상호를 작게라도 사용할까 고민하다 아쉽지만 시골 문방구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과감히 접은 것이 문구 전문점으로 다시 선데 도움이 됐듯이 현재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구는 점점 줄고 젊은이는 도시로 나가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보은의 현실에서 문구점을 찾는 손님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이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계획을 차근차근 실천하고 있다.
<대물림 업소를 찾아서(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