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 몸소 실천한 "참수행인"

입적한 진공당 탄성스님 행장

2000-06-17     보은신문
지난 8일 오후 5시5분 이승과의 인연을 다하신 진공당 탄성 대선사.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맞는등 투철한 수행자였으며 불교계의 큰별이었다. 1929년 3월 충남 연기군 금남면 염곡리에서 부친 박병학거사와 모친 정씨를 인연으로 오남매중 막내로 출생해 1944년 모친과 함께 찾아간 계롱산 신원사에서 <초발심자경문>에 나오는 "사흘닦는 마음은 천년을 두고 보배요, 백년동안 물건을 탐낸다 해도 하루아침에 티끌이다" 이라는 구절을 듣고 출가를 결심하고 당대 선지식 금오대선사를 친견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1945년 3월 계룡산 갑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고 그후 화엄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이수하고 동화사, 수덕사, 봉암사등 여러선원에서 참선수행에 전념하셨고 1970년 금오스님을 모시고 청계사 주지를 역임하고 1972년 월산스님을 조실로 법주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총지선원의 외호와 불사에 전념하셨다. 당시 스님의 출생은 충남이었지만 이후 본적을 속리산 법주사로 옮겨 속리산인을 자처하시며 수행에 정진하셨으며 1981년 폐사지나 다름없었던 괴산 공림사 주지로 부임하셔 감인선원을 재건하고 오로지 깨달음을 향한 정진의 도량을 열고 참선수행을 강조했다.

조계종단이 큰 비바람에 흔들리는 돛단배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유능한 선장이 되어 향해를 계속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수습한이후 다시 수행자의 모습으로 돌아오셔서 참수행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1980년 신군부의 의해 10.27법난직후 정화중흥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아 종단 안정의 기틀을 다졌으며 94년 당시의현 총무원장 퇴진문제로 불거진 분규때는 개혁회의 상임위원장 겸 총무원장을 맡아 종단개혁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또 1998년 11월 월주 총무원장 3선시비로 빚어진 조계종 사태때도 수습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수습이 끝난 후에 언제나 그랬듯이 괴산 공림사로 돌아가셨다.

대전 연구단지내에 법주사 포교당태전사 건림을 발원하고 창건하셨으며 1997년 원로회의 의원으로 1999년에 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됐으며 총무원장 재임시에도 전철을 타시고 평생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을 이요하시는 검소함을 실천하면서 참수행을 몸소 실천하셨다. 스님께서는 평소 제자들에게 "출가한 목적은 수행정진하여 견성하는 것"이라며 수행자의 본분은 걸망메고 돌아가정진하는 것을 강조했으며 임종전 문하의 제자들에게 "검소하게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말고 수행 정진하라"고 하시며 괴산 공림사 감인선원에게 입적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