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용군으로 끌려간 남편을 기다려온 80평생
삼승면 선곡리 안병임 할머니의 삶
2007-06-08 보은신문
어머니를 여읜 후 안 여사는 서모에게 온갖 설움과 고통을 받으며 눈물로 살아왔고, 9살 되던 해에는 민며느리로 시집을 가, 시어머니와 남편, 시동생과 시누이 등 7식구를 뒷바라지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일곱 식구의 수발을 맡으며 많은 식구의 빨래와 하루 삼시세끼를 챙기며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염병에 걸려 자리에 누웠고, 어린 나이에 또다시 남편 병시중까지 도맡아야 했다.
가난한 살림에 일곱 식구를 보살피며 또다시 남편 병시중까지 맡아야 했던 것이다.
◆의용군으로 끌려간 남편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9살에 시집와 13살이 되던 해, 남편은 병도 낫지 않은 상태에서 의용군으로 끌려가게 됐다.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 4년이 채 흐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13살 된 어린 아이를 붙잡고 25살 된 남편은 굵은 목소리로 “병임아, 내가 꼭 돌아 올 테니 우리 어머니와 우리 동생들 모두를 너에게 맡기고 가니 잘 있어야 한다. 나 돌아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꼭 기다리고 있어. 꼭 돌아올게. 가지마.”라는 말을 남기고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12살이나 위인 남편이 왜 그렇게 무서웠던지.
안병임 할머니는 함께 한 4년 동안 남편의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고, 잠도 홀시어머니 곁에서 자야 했다.
몸 한 번 섞지 못한 남편이었지만 손을 꼭 잡고 굵은 목소리로 “가지 말고 기다려”를 외치던 그 목소리가 마음속에 남아 밤이면 밤마다 꿈속에 나타난 남편을 못잊어 하며 가족들을 보살폈다.
시누이 둘을 시집보낸 뒤에도 시어머니를 남편처럼 사랑했고, 없는 살림에 시동생 둘을 보살피며 봄에는 쑥을 뜯어 빼삐떡(개피떡)을 만들어 팔았고, 겨울이면 시루떡 장사를 했다.
꽃다운 젊은 청춘을 가난 속에서 나무하고, 떡 장사를 하며 시어머니와 시동생들을 보살폈다.
◆시어머니의 죽음과 기다림
시어머니를 남편 삼아 살아가던 안병임 할머니에게 어느 날 시어머니는 “얘야, 내 아가 너 볼 면목이 없다. 내가 죽더라도 시동생 의지하며 굳게 살아라. 아들 봉하가 꼭 돌아온다고 했으니 죽지 않으면 꼭 올 터이니 나 죽더라도 가지 말고 굳세게 살아다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동생들까지 모두 장가를 보낸 후에도 그녀의 삶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동생의 자식 7남매까지 그녀의 몫이었고, 조카의 자식들까지 그녀의 손으로 다 키워냈다.
안병임 할머니의 나이도 어느덧 80을 넘겼다.
남편의 한마디와 시어머니의 간절한 부탁만을 믿고 오늘도 그녀는 “꼭 돌아온다던 최봉하(남편)는 언제 오려나?”하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쉰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남편을 의용군으로 끌려 보낸 후 남자의 향기도 모른 채 80평생을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 밤이면 밤마다 눈물로 지새우며 “기다려 달라”는 남편의 굵은 목소리만 믿고 오늘도 ‘최봉하’라는 남편의 이름 석 자를 또 부르고 한숨을 내쉰다.
일제에 나라를 잃고, 남편마저 일제의 군국주의 야욕에 빼앗겨야 했던 안병임 할머니.
숫처녀의 몸으로 세월을 원망하고 세월을 한탄하며 오늘도 긴 한숨을 내쉰다.
/조순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