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96)-외속리면 장재리(대궐터)

속리산으로 향하던 세조대왕이 행궁을 지은 곳

2007-05-04     보은신문
눈길이 머물고 발길이 닿는 곳, 장재리 대궐터 한옥마을.

누구나 한번쯤은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한옥이 마을을 이루어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마을에 있는 저수지 둑에서 내려다본 한옥마을의 풍경은 세조대왕의 행궁이 있던 그때를 연상케 했다.

장재리는 본래 보은현 속리면 지역으로서 옛날에 표장자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의 큰아들이 개울 건너에 살았다 하여 장자(長者)불 또는 장자동이라 부르다가 1914년 독점과 대궐터를 합하여 장재리라 하고 1947년 속리면을 안팎으로 분면할 때 외속리면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말티고개로 이어진 국도 37호선을 사이에 두고 도로 윗쪽의 대궐터는 세조대왕이 신병을 고치고자 속리산을 찾았을 때 행궁을 지었던 곳이며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집이 모두 한옥으로 지어진 한옥마을이다.

그리고 도로 아래쪽은 표장자가 독을 구워 생업을 삼았다는 독점마을이 자리한다.

1957년 대궐터에 축조된 장재저수지는 박석재(말티재) 밑에 있어 박석지라고도 하며 장재리와 인근 마을인 오창1,2리, 구인리 4개 마을에 농업용수로 활용된다.

장재리 마을 주민들이 해마다 저수지 둑을 태워 주변 정리를 하고 수로를 청소하는 등 지속적인 관리를 하고 있다.

대궐터 주민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모래로 여과해 식수로 사용하는데 굳이 여러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물맛이 얼마나 좋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독점마을에 위치한 장재리 경로당이 대궐터 주민들이 이용하기에는 거리가 먼 관계로 대궐터에는 경로당이 따로 마련돼 있다.

53가구 12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는 장재리 마을봉사자로는 이장 남성우(57)씨와 대궐터 경로당 노인회장인 김두환(72)씨, 장재리 경로당 노인회장인 강경구(70)씨 그리고 부녀회장 김영희(51)씨가 있다. 맡아서 할 젊은이가 없어 현재 새마을 지도자는 없다고 한다.

# 세조대왕의 행궁이 있던 곳
말티재를 넘어 속리산을 가려면 필히 거쳐야 하는 장재리는 조선조 세조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될 정도로 세조대왕에 얽힌 전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대궐터가 그렇고 미륵댕이(수레재), 북바위, 말티재 등이 그렇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속리산을 찾은 세조 행렬이 보은읍을 거쳐 현재 속리산 쪽과 상주 쪽으로 가는 말티휴게소가 있는 삼거리를 지나 속리산 쪽으로 나있는 나즈막한 고개를 막 올라섰을 때였다.

행렬 앞에 한 노승이 나타나 세조 앞에 합장 배례한 후 "이 고개 너머에 오봉산이 있는데 그 산 아래에 행궁(行宮:별궁)을 짓고 오고 갈 때 쉬어 가소서" 하고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세조는 노승이 말한 대로 행궁을 짓게 하고 행궁 앞산 바위에 북을 달아 아침, 저녁으로 북을 쳐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도록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돼 노승이 나타났던 고개를 미륵불이 변신하여 나타난 곳이라 하여 미륵댕이라 부르고 또 한편으로는 임금의 수레가 넘은 고개라 하여 수레재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오봉산 아래 행궁을 지었던 자리를 대궐터, 대궐터 건너편 산에 있는 북을 달았던 바위를 북바위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도 대궐터에는 기와장이 발견되고 있어 옛 대궐터였음을 가늠케 한다.

# 열두굽이 말티고개
대궐터에 머문 세조가 속리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해발 800미터의 열두굽이나 되는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가야만 했는데 이곳이 바로 말티고개이다.

세조가 고갯길을 연(輦)으로 넘을 수 없어 장재리에서 말로 바꿔 타고 고개를 넘고 내속리면 갈목리의 고개 밑에서 다시 연으로 바꿔 탔다고 하여 말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속리산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말티고개는 처음 고려 태조가 속리산에 올 때 길이 험하고 가파라 엷은 돌을 깔고 넘었다 하여 박석(薄石)재라고도 하는데 1966년 도로포장 공사를 할 때 옛날의 흔적이 보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1923년 박중양 충북도지사가 처음으로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노폭을 넓혔으며 1935년 자동차 1대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확장했다.

그러다가 김영호 도지사 재직시인 1966년 6월 국군과 미군의 장비가 동원되어 말티재를 포장해 11월 1일에서야 폭 10∼15m에 이르는 오늘의 말티고개가 탄생하게 되었다.

말티고개 정상에는 노산 이은상 선생이 이같은 말티고개의 유래 및 연혁을 담은 표지석이 있다.

# 전국 최고의 미향으로 손꼽혀
장재리 대궐터는 이조시대에 지은 전통가옥은 아니어도 한 마을 전체가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어 정감 어린 풍경을 자아낸다.

지난 79년에 조성된 이 한옥 마을은 외국인 홍보마을로 육성돼 그동안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다녀갔으며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 올림픽을 대비하여 관광 도로변 및 주거환경을 정리하였다. 지금도 관광도로변이어서 언제나 주변환경을 깨끗하게 정리해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더욱이 89년에는 내무부로부터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 대상을 받았을 정도로 장재리 한옥마을은 전국 최고의 미향으로 손꼽혔다.

각종 새마을 사업이 잘 이루어지고 농업생산 기반 시설 등이 확충되어 면내에서뿐만 아니라 보은군에서도 살기 좋은 마을로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대궐터에는 처음에 14가구였던 것이 현재 2가구가 늘어나 16가구가 생활하고 있다.
한옥마을이 조성되기 전에는 민가가 3가구뿐이었고 전부 논, 밭이었다고 한다.
가구당 180평의 주택 용지에 집을 지었는데 마을을 조성할 당시 지적을 정리하지 않아 주택에 밭, 도로, 묘 등 다른 필지가 들어가 있으며 어느 집은 필지가 3∼4개씩 돼 남성우 이장은 지금이라도 필지를 정리해줬으며 한다고 했다.

관선 군수 시절에는 기와가 깨지고 물이 새는 등 가옥에 문제가 생기면 군에서 보수를 해주었는데 민선 군수 때부터 그런 지원이 없어졌다고 한다.

#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반상회 개최
3개 반으로 운영되는 장재리는 현재 3반인 대궐터만이 반상회를 하고 있지만 그전에는 3개 반 모두가 반상회 운영을 활성화했었다.
반상회 날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휴일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이 모여 화합도 도모하고 세상사는 이야기며 영농정보도 교환하는 등 다양한 화제로 회의를 진행해 주민 참여도가 높았다.

반장 집에서만 개최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개최해 이웃 간에 정을 더욱 돈독히 쌓을 수 있었다.

92년에는 반상회 운영 우수 마을에 3반이 선정되어 김홍운 반장이 91년 도지사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매달 25일은 대궐터 주민들이 반상회를 하는 날이다.
집집마다 떡, 고기, 음료수 등을 마련하고 분위기가 잔치집처럼 흥겨워 이런저런 얘기로 한바탕 웃고 나면 기분까지 좋아지니 반상회 하는 날을 기다리는 마음도 보람이 있다.

대궐터 한옥마을은 명소화 사업이 한창인 말티고개 입구에 위치한다.
전국 최고의 미향으로 손꼽힌 화려했던 시절이 한때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가정을 이뤄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길 바라는 것처럼 주민들은 한옥마을이 오래도록 그 명성을 유지해 항상 살기 좋은 마을이 되길 바라고 있다.

김춘미 프리랜서

(다음호에는 장재리 독점마을이 소개됩니다.)

▲말티재로 향하는 길목에 세워진 유래비는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속리산을 찾은 세조가 행궁을 지었다는 대궐터의 유래를 상세히 알려준다.
▲독점마을에 위치한 장재리 경로당이 대궐터 주민들이 이용하기에는 거리가 먼 관계로 대궐터에는 경로당이 따로 마련돼 있다. 마을 주민이 경로당 일부를 임대해 구판장을 운영하고 있다.
▲1957년 축조된 장재저수지는 박석재(말티재) 밑에 있어 박석지라고도 하며 장재리와 인근 마을인 오창1,2리, 구인리 4개 마을에 농업용수로 활용된다. 말티재를 넘어 속리산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곳으로 주변 경관이 빼어나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