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93)-보은읍 금굴2리

아홉 성씨가 어질게 살았다는 구랭이 마을

2007-04-06     보은신문
보은읍에서 영동방면으로 19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금굴 1리를 지나 곧게 뻗은 도로와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이 도로 우측으로 작은 산을 뒤로하고 일렬로 길게 자리한 마을이 금굴2리이다.

금굴1리와는 작은 동산을 경계로 나눠지고 있으며 새터, 중간말, 건너말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 아홉 씨족이 다투지 않고 선량하게 살았다하여 구랭이라 불리었던 금굴2리는 마을 뒤편에 거북바위가 있어 금구리라 부르기도 하였다.

본래 보은군 서니면 속해 고려 시대에는 금을 많이 캤다하여 금굴이라는 지명으로 불리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쇠푸니, 은사뜰, 새터, 중간말, 건너말을 통합, 금굴리로 지칭하고 읍내면(보은읍)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60년 쇠푸니와 은사뜰은 금굴1리로 새터와 중간말, 건너말은 금굴2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63가구 160명이 생활하는 금굴2리 마을 봉사자로는 김태환(46) 이장과 전병각(77) 노인회장, 안기예(55) 부녀회장, 윤태희(41) 새마을지도자가 있다.

# 남다른 개척정신으로 가뭄 딛고 벼농사 지어
금굴 2리는 현재 논이 50.4㏊ 밭이 5㏊로 논이 밭보다 현저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옛날부터 벼농사만 바라보며 살아온 주민들에게 농사지을 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주민들은 마을 기금으로 둔덕리 소재의 농경지 1만평을 매입해 저수지를 만들었다.

주민 모두가 나서서 삽과 괭이로 땅을 파고 저수지를 개간, 마을 자체 수원으로 벼농사를 짓게 되었다.

당시 일제시대의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마을의 책임자였던 박일호씨와 박원근씨는 저수지를 개척하는데 앞장서고, 농경지 4000평과 임야 2만 7000평을 마을 재산으로 만들어 놓아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청주에서 상주를 잇는 고속도로 공사에 임야 7000평이 편입되었다고 한다.

마을 살림살이를 윤택하게 할 수 있도록 기여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주민들은 지난 93년 마을 입구에 공덕비를 세워 업적을 기리고 있다.

주민들의 땀과 노력으로 일군 저수지는 수리시설 마련으로 벼농사를 용이하게 해 마을에 부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농지개량조합(현 한국농촌공사)은 농업기반시설을 인수, 관리한다는 이유로 금굴2리 주민들이 그동안 이용해온 저수지를 이관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주민들은 반대투쟁뿐 아니라 행정소송까지 감행했지만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마을의 저수지를 억울하게 빼앗기고 수세를 납부하면서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농지개량조합이 농업용수 사용료라는 명목으로 300평당 1만 5000원의 고액 세금을 징수한데 반발하여 1980년대 후반 수세폐지를 주장하는 수세싸움이 전국으로 확산돼 전국수세폐지대책위준비위원회가 결성된 걸 보면 농민들의 수세 납부가 얼마나 부당했는지를 알 수 있다.

98년에는 저수지 주변사업으로 둔덕저수지의 물을 빼고 준설작업을 할 때 가시연꽃이 발견되기도 했다. 가시연꽃은 동양의 특산종으로 저수지 전체 면적의 10%에서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수리시설 마련으로 벼농사를 잘 지어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주민들의 열의는 저수지 개간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래 전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자비를 들여 나무 대문을 철문으로 바꾸는 등 모범적인 마을정비 사업을 실천해 자립마을로 선정, 포상으로 대통령 하사금 150만원을 받았다.

그 돈 150만원과 마을 자체자금에서 나머지를 충당해 74년 총 330만원으로 양수장을 설치했다. 처음에는 발동기를 이용해 물을 퍼올리다가 78년부터 전기모터를 사용했다고 한다.

양수장은 보청천 옆에 설치해 이용할 수 있는 수량은 풍부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저수지를 개간하고 양수장을 설치하는 등 주민들의 개척정신이 남달랐기에 가뭄 걱정 없이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옛날에는 벼 매상가가 높아 벼농사만 지어서도 자식들 대학 공부시키고 잘 살았으나 지금은 밭 면적이 적다보니 특수작물 등 돈이 될만한 밭작물을 재배 할 수가 없어 사정이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한다.


#보은을 오가던 길목으로 상권 형성
1924년 흉년을 맞아 굶주린 주민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등 기민을 구제해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주민들은 만석 거부 참봉 안종건씨를 기리기 위해 금굴리 중앙 웃주막에 영세불망비를 세워 추모하였다.

웃주막은 금굴1리와 2리의 경계가 되는 새터에서 보은으로 향하는 도로변을 가리키며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비석거리가 부르게 되었다.

웃주막에는 방앗간, 주막, 이발소, 상점 등이 형성돼 있어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삼승, 탄부, 청산 사람들이 걸어서 보은을 오고가던 길목이라 상권이 활기를 띠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으나 교통 수단이 좋아지면서 차츰 쇄락해 80년 수해 이후에는 장사를 하던 가게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출향인 초청, 마을 잔치 열어
30평 규모의 경로당 안에는 출향인들이 기부했다는 운동 기구가 있다. 또 서울에 사는 누구는 마을 전경 사진을 직접 찍어 액자에 담아 주는가 하면, 명절 때 고향에 내려왔다가 동네 어르신들 술값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성의를 표하고 가는 이들도 있다.

몸은 떠나 있지만 고향을 생각하고 관심을 가져주는 마음이 더없이 고맙기만 하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주민들.

그동안 출향인들이 고향에 보내준 관심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주민들은 작년 6월 마을 잔치를 열었다.

서울, 대전, 청주 등 각처에 사는 출향인들을 초청, 성황리에 잔치를 치뤘다고 한다.

잔치 준비에 사용된 450만원의 경비는 마을에서 전부 부담했으며 출향인들이 주는 찬조금은 일절 받지 않았다.

음식 장만하랴, 손님 맞이하랴, 잔치에 사용한 그릇들 치우랴, 3일 잔치를 벌이는 동안 주민들은 참 뿌듯하고 기뻤을 것이다.


#토지 보상가 반발 불러
보은읍 금굴리에서 내북면 봉황리로 이어지는 보은∼내북간 국도 4차선 확·포장공사의 금굴 구간 편입 토지에 대해 얼마 전 국토관리청으로부터 통보 받은 보상가가 터무니없이 낮아 주민들이 밤잠을 설치고 있다.

대전국토관리청은 3월12일자로 금굴리 일대 편입 토지 및 지장물에 대한 보상가를 주민들에게 통보하고 4월2일까지 보은읍 신함리 소재 감리단 사무실에서 보상비를 청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편입토지 내 주민들은 평당 7만∼9만원 사이로 책정된 보상가가 현실가에 비해 너무 낮다며 수용불가 입장을 보이고 보은 금굴 국도확포장 수용대상 주민(대표 김제동)단을 구성해 3월 27일 대전 국토관리청을 항의 방문하고 현실가를 반영하지 않으면 토지수용에 응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토지 보상가 책정은 감정평가사가 현지 조사를 거쳐 책정한 금액으로 당초 평가 일로부터 1년 이내에는 재평가를 할 수 없지만 중앙 토지수용위원회에 재결을 신청할 경우 재평가를 받을 수 있어 6월까지 중앙 토지수용위원회에 재결 신청을 하면 재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해 주민들이 한시름을 덜게 되었다.

마을을 관통하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보은∼내북간 국도 4차선 확포장 공사는 마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좋은 변화보다는 주민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이다.

국도 확포장 공사를 하면 본선도로와 이설도로간 최고 2m이상 차이가 나 마을 진입로에 박스를 설치해야 하는데 최고 4m이상 도로제방이 축조돼 집중 호우시 농경지 침수는 물론 주민들의 통행에도 많은 불편을 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마을 뒤로는 고속도로가 마을 앞으로는 4차선 국도가 완공되면 마을이 사각형으로 막혀 꼭 단지 속 같이 변해 양지발라서 살기 좋은 동네 모습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또 교통량 증가로 공해와 소음이 심해져 이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금굴2리는 금적산의 끝자락에 위치해 해가 떨어지는 저녁 무렵에는 금적산과 마을 뒷산이 온통 금빛으로 물들어 버린다고 한다.

넓은 들녘과 어우러진 저녁 노을은 원치 않는 마을의 변화 앞에서도 언제나 아름답게 빛나 주민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김춘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