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집 -화신상회, 경남상회, 해림상회

지역 한복의 역사 담고 있어

2007-02-16     송진선
한 해의 시작인 상서로운 날 설. 설날은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먼저 간 조상신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대부분이 도시생활과 산업사회라는 굴레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 설날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곧 도시생활과 산업사회에서 오는 긴장감과 강박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는 즐거운 시기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된 것이다.

설날은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교체기라고 할 수 있다. 즉 평소의 이기적인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함께 하며 정신적인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이 바로 설날인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국가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설날은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다. 국민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또 새 옷을 즐겨 입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같은 한민족이라는 일체 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설날이 가지는 의미, 즉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명절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설을 맞아 이번 대물림업소 소개는 대를 이어가며 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는 한복집을 선정했다.

한복 골목으로 알려진 보은읍 삼산리 종합시장 내에 공교롭게도 한복 대물림 업소인 화신상회, 경남상회, 해림상회가 모두 자리하고 있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지금의 화신상회 자리에는 해림상회가 있었고 지금의 해림상회 자리에서 화신상회가 화신상사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했다.

모두 내집이 아닌 남의 집 시절이고 혼수 및 한복 경기가 호황을 누릴 때 밤잠을 설치고 끼니를 걸러가며 열심히 장사를 해서 모두 지금의 건물을 사서 자리를 잡았다.

요즘에야 차례를 지내고 제사 때도 한복대신 양복을 입는다.

또 한복을 입어야 하는 경우가 생겨도 한복을 입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불편할 뿐만 아니라 유행을 타는 한복을 맞추기보다는 대여를 해서 입는 추세다.

훨씬 경제적이고 또 유행하는 한복을 입음으로써 고운 자태도 뽐낼 수 있어 여자들은 한복을 입어야 하는 자리는 대여해서 입는 쪽이 더 유행을 하고 있다.

한복을 입어야만 예를 갖췄다고 인식됐을 과거에는 설이나, 추석, 제사 때는 반드시 한복을 입었다.

당시는 천을 끊어 한복을 마르는 바느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면 이들이 공임을 받고 한복을 만들어와 이들 가게에 납품하는 식이었다.

남자들의 경우 그냥 바지저고리 차림이 아닌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어야만 제상 앞에 섰을 정도다.

그러니 설 등 명절이 돌아오면 미리 한복을 맞췄고 전에 입던 한복을 입을 경우 미리 저고리 동정을 새로 달고 또 다리미질을 해서 주름 없이 갖춰 놓았다. 그것으로 차례 지낼 준비를 시작하는 셈이었다.

이때는 결혼한 어른이나 아직 미혼이나 또 어린아이들까지 한복을 입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차례를 지내고 난 후 조상의 산소를 찾아 예를 갖추는 성묘 때는 집집마다 가족들이 울긋불긋한 한복을 입고 나서기 때문에 산이 화려했을 정도다.

더욱이 한복은 명절 때만 착용을 한 것이 아니고 결혼예복이고 또 혼수품이었으며 회갑연 등이 있으면 의례 주변 가까운 친척들에게 접대를 했던 품목이었다.

회갑연을 갖는 본인 부부만 한복을 새로 해 입는 경우도 있지만 자녀에다 손자까지 그리고 만약 남자가 회갑연을 하면 처가 쪽까지 한복을 해줘 부잣집은 한 집에서만 20여벌을 주문도 할 정도다.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두루마기까지 맞추기 때문에 그야말로 한복 가지 수로는 엄청난 양이었다.

또 남자는 양복을 입어도 여자는 한복을 입는 경우가 많았고 여자들의 경우 유행을 잘 탔기 때문에 한복집은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특히 한복의 감은 크게 유행을 타서 80년대에는 공단 바람이 불었고 90년대에는 아주 얇은 깨끼가 유행을 하더니 천이 조금 더 두꺼운 깨기가 나왔고 지금은 이 두꺼운 깨기와 함께 공단보다는 얇고 천에 여러 문양 등이 들어간 양단이 유행이다.

또 한복 집마다 한복만 한 것이 아니라 이불까지 같이 취급해 아예 이불 방을 별도로 두고 목화솜을 넣은 이불을 꿰맸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일가친척들에게는 이불을 혼수품으로 주는 경우가 가장 많기 때문에 한복집은 그야말로 돈을 끌어모으는 장사였다.

식구들이 삼 시 삼 때를 제대로 갖추고 먹을 시간이 없어 대충 끼니를 떼웠을 정도였다.

한복집을 운영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80년대 가장 호황을 누렸고 90년대 초반까지 호황은 이어졌으나 90년대 후반이 되면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특히 98년 IMF를 겪으면서 매출은 상당히 많이 떨어졌고 지난해에도 경기가 안좋았는데 올해 설 경기는 더욱 없다는 것.

KBS를 통해 방송됐던 드라마 황진이 영향으로 황진이가 선보였던 모양이 한복이 유행을 할 정도로 신혼 부부들이나 어린이용으로 일부 한복 열풍이 분다고 하지만 그 영향이 우리 지역에 까지는 미치지 않고 있다.

화신상회와 경남상회, 해림상회를 취재하는 동안 한복을 맞추러 오거나 이불을 사러오거나 하는 큰 손님들이 들지 않았다. 설날이 코앞이었는데 설 경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화신상회
직조공장 운영하다 한복집 운영
지금은 화신 혼수판매로 간판으로 바꾼 화신상회의 전신은 직조공장이었다. 60년대 보은읍 이평리(지금 이발소 앞 2층집)에서 10여명의 종업원을 두고 있었을 정도로 공장은 호황이었다.

시아버지 박호상(84)씨가 직조공장에서 이불 호청, 솜 싸개, 한복 감 등 포목을 생산하면 시어머니 김영순(82)씨는 화신상사라는 도매상을 열어 공장에서 생산한 포목 종류와 타월, 양말, 버선 등을 소매점에 대주고 또 일반인에 판매를 하기도 했다.

공장도 잘 돌아가고 도매점 매출도 상당히 높았으나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천성인 탓에 물건을 대주고도 물건값을 떼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도매상을 접고 소매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 시집와서 1남1녀의 자녀를 돌보며 살림만 했던 며느리 한명숙(47)씨는 호황기때 시부모님을 돕다가 20여년 전 아예 화신상회를 물려받아 한복집을 운영하고 있다.

특별히 바느질 솜씨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눈썰미가 있어 권하는 대로 손님들이 만족해 하고 또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손님이 원하는 대로 주문을 해줘 단골이 많았던 시어머니의 단골손님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자신이 운영하면서 새 단골이 생겨 가게가 예만은 못하지만 그럭저럭 운영이 되고 있다.

대를 이어가고 있어 만일 며느리가 물려받고 싶어하면 대를 다시 잇고 싶은 마음이란다.

한명숙씨는 한민족의 정신이 담긴 한복이 경기 흐름을 타지 않고 꾸준히 사랑을 받고 또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화신상회 한복 집이 아랫대로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경남상회
시어머니가 35살때 시작
1970년 35세였던 시어머니 한길자(72)씨가 직접 한복을 마르며 경남상회라는 한복집을 운영하며 경남상회의 역사는 시작됐다.

23년 전 시집온 며느리, 지금 경남상회 주인인 이영애(46)씨가 살림도 하고 시어머니 가게도 도우면서 장사를 하다 물려받아 전담을 한 것은 10년 정도 된다.

시어머니가 워낙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치마 저고리를 말랐는데 대목 때면 물건 주문이 밀려 시아버지 윤봉권(75)전 면장 등 가족들에게 밥을 차려주는 것은 고사하고 때를 거르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들이 어머니의 손을 기다리지 않고 알아서 밥을 차려먹었다.

특히 직접 바느질을 했던 시어머니는 오십견까지 왔고 당뇨도 앓았을 정도로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당시 남편 윤광훈(51, 군 사회복지과 위생담당)씨가 도청으로 갈 기회가 있었으나 너무 바쁜 시어머니를 나 몰라라 하고 청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친구를 만나러 나갈 시간도 없었고 친정에도 밤에 갔다 아침 일찍 돌아왔을 정도로 보은에서 시어머니를 도왔고 가게를 물려받으면서 시어머니는 건강을 다져 지금은 언제 병을 앓았는가 싶게 아주 건강해졌다.

너무 힘이 든다는 것을 안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바느질을 배우지 못하게 했지만 이영애씨는 시어머니가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몇 번 꿰맸다, 뜯었다는 반복하면서 이제는 치마는 마를 줄을 안다고.

슬하의 2녀1남 중 누구라도 경남상회를 물려받겠다고 하면 물려주고 싶다는 것이 이영애씨의 바람이다.

#해림상회
아버지가 18살 때 시작
해림상회는 황영구(73)씨의 3념 2남 중 막내딸인 황미숙(43)씨가 물려받은 지 11년 됐다.

황미숙씨의 아버지 황영구씨가 18살 때 어머니 이광래(71)씨와 함께 바느질도 하면서 한복감도 팔고 이불도 꿰매고 파는 해림상회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햇수로는 벌써 55년 되는 셈이다. 바느질 등 솜씨는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닌 황미숙씨가 3녀 2남 중 막내인데 해림상회를 물려받으려고 그런 것인지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이 운영하는 한복 집에 관심이 많았다.

놀러나가지도 않고 가게에 붙어있으면서 부모님 도와주고 오늘은 얼마나 팔았나, 다른 가게는 어느 정도 사람이 드는가 관심을 기울일 정도였다는 것.

90년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을 때는 여느 한복가게나 마찬가지였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은 것이 아니라 밥을 먹을 새가 없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부모님은 위장병을 달고 살았고 소화제도 달고 살았다. 밀린 한복 만드느라 커피를 마시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항상 옆에서 지켜본 황미숙씨도 여전히 그런 전처를 밟았다.

한복이 호황을 누릴 때는 너무 바빠 남편 김호동(대한미건 대표)씨 등 가족들에게 제대로 밥상을 차려주지 못했고 한 참 크는 자식들에게 영양분이 풍부한 간식을 챙겨주지 못하고 음식을 시켜주는 등 엄마의 손길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안쓰러웠는데 지금 그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중학생, 고등학생인 1남1녀의 자식들을 갓난아기 돌보듯 하게 된다고.

지금 대를 이어가며 한복집을 운영하는 이들 가게 모두 장사는 예전에 비하면 형편이 없다. 그래도 우리 것을 지킨다는 자부심만은 가게 안이 좁을 정도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크게 뒤떨어지기 때문에 이들은 시대 경향을 읽어 한복 대여도 하고 브랜드 이불 대리점도 하면서 옛날 경제가 다시 살아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침이면 어김없이 문을 열어 큰손님이 들기를 기다린다.

<대물림업소를 찾아서(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