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면 거교1리(75)

건고추 판매 소득사업 지원을 기다리는 주민들

2006-11-24     보은신문
아침 일찍 거교1리를 찾은 날 대청호 위로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회북면에서 회남면 소재지를 잇는 거신교를 지나면 바로 오른편으로 '거교1리'라는 이정표를 볼 수 있다.

마을까지 꼬불꼬불 이어져 있는 1차선 좁은 도로를 따라 도착한 그곳은 산아래 위치한 작은 촌락이었다. 그리고 마을 앞으로는 대청호가 펼쳐져 있었다.

22가구 4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는 거교1리.

이곳이 것더리와 멱골, 본말로 불리던 60호의 큰 마을이었다는 것은 다 옛날 얘기일 뿐이다.

현재 마을이 있는 곳은 주민들이 일구던 밭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마을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대청호변이 원래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그곳까지 올라와 잠기는데 금년에는 가뭄이 심해 물이 저 아래만 흐르고 마을 쪽으로는 바닥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덕분에 옛날 마을자리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이 수몰되면서 위쪽 농경지였던 곳에 터를 닦아 집을 지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큰 이동은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옛 집 터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거교1리는 과거의 흔적들을 간직한 곳이다. 집터였던 곳과 대청호의 경계에는 오래 전 주민들이 이용하던 구도로와 다리가 있다. 다리는 흙에 묻혀 그 모습이 조금만 남아 있었지만 옛날 마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구도로는 비포장 길로 예전에는 사람을 가득 실은 버스가 그 길을 달리며 흙먼지를 제법 날렸을 것이다.

지금은 사는 것도 많이 불편해졌다. 그전에는 마을 앞에 바로 도로가 있어 버스를 이용하기가 쉬웠는데 이제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거교2리까지 먼 길을 걸어나가야만 한다.

마을 뒤로는 봉우리가 다섯 개인 오봉산이 있는데 자롱 고개는 남대문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주민들이 그곳을 넘어 청원군 문의장과 신탄장을 보러 다녔다고 했다.

이곳은 청주한씨 세거지로 전에는 청주한씨가 많았지만 이젠 3가구가 전부이다. 마을 입구에는 1954년 세운 청주한공철수효행기념비가 있다. 한영 이장의 말로는 그의 아들 7명은 모두 교편을 잡았으며 13명의 손자는 전부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마을 봉사자로는 한영(66) 이장과 한태전(83) 노인회장, 홍종원(49) 새마을 지도자, 황태임(63) 부녀회장이 있다.


# 옛날이 그립다
농토는 잃어버렸고 이웃들은 떠나갔다.
산 너머에 땅이 있어도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묵은 밭들이 많다.
전에는 벼농사와 밭농사를 주업으로 했지만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어부들이 생겨났다. 한때어부는 그물을 놓고 고기잡이배를 모는 일이 신났었다. 기대 이상의 수확과 노동의 댓가가 만족스러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앞 호숫가에는 고깃배 대신 그물이 놓여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물이 출렁이고 있었을 텐데 올해는 가뭄이 극심해 수몰선까지 물이 닿지도 못하고 호수는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니 물 위에 떠 있는 그물은 옹색하고 물이 빠진 바닥에 말라붙어 있는 그물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대청댐으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일이 되어버린 듯하다.

마을에는 젊은이라고 해봐야 6명 정도가 고작이다. 연로한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제 일할 기운도 없다. 가구 수는 이 집 저 집 다 합쳐도 20여 호를 넘지 않는다.

마을이 쇠락하기 전 이래봬도 사는 형편이 남부럽지 않았다는 거교1리.

거교1리 역시 감 농사를 많이 했다고 한다. 회남면이 유달리 감이 잘 재배되는 지역이다 보니 지난 호에 보도됐던 거교2리와 마찬가지로 거교1리에서도 감 농사로 농가소득을 올렸다는 얘기를 주민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감 중에서도 월하를 주로 재배했으며 전국에서 품질을 인정받는 지역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잘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감나무도 별로 없을뿐더러 대청호가 생긴 뒤부터는 감이 나무에서 자꾸 빠져 농사가 안 된다고 한다.

감을 깎아 말리는 한 농가가 눈에 띄었다.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감은 할머니의 요긴한 간식거리나 아들, 딸, 손주라도 오면 먹으라며 내줄 요량으로 말리는 것처럼 보였다. 양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생색을 내기에는 지난날이 너무 풍요로웠다.

마을에는 도회지에서 들어와 사는 이도 있다. 한영 이장은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주변 경치가 좋아 이사를 온 것이라고 했다.

경치는 탐이 날 정도로 좋았다. 남들에게는 집을 짓고 살고 싶을 만큼 매력 있는 곳일지라도 주민들은 옛날이 그립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체념할 수 있었고 새로운 터전을 일구며 살아왔다.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 희망을 놓지 않은 사람들
올해 거교1리에는 창고와 고추 건조기 2대가 설치되었다. 마을이 지대가 높다보니 흙을 채우고 석축을 쌓아 부지를 마련하고 그 위에 시설을 마련한 것이다.

마을에 몇 명 안 되는 청년회원들은 이 시설을 이용하여 농가소득을 올려보고자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주민들이 재배한 고추뿐 아니라 구매도 하여 고추를 대량 확보한 다음 그것을 건조기에 말려 건고추를 도시로 판매할 계획이었다. 창고도 있어 보관도 용이하고 무엇보다 주민들에게는 열의가 있었다. 그러나 풋고추를 구매할 자금이 없어 올해는 사업용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주민들만 이용했다고 한다.

창고는 아직까지 특별한 용도로 활용되지 못해 농기계 등을 보관하고 있었으며 한편에는 저온저장고도 설치되어 있었다.

한영 이장의 말로는 흙을 채우고 석축을 쌓아 부지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사업비가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애써 만들어 놓고 제대로 쓰여지지 않고 있어 안타까운 심정이다.

젊은이들은 이 사업계획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마을에 뚜렷한 소득원이 없어 절실하고, 몇 명의 청년회원들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풋고추를 살 자금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행정기관에 요청도 해봤지만 명쾌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못난 자식에게 눈길 한 번 더 주고, 관심 한번 더 갖는 것이 어미의 마음일 것이다. 거교1리는 모정과 같은 따뜻한 관심이 필요한 곳인 것 같았다.
비록 마을은 쇠락했지만 미래를 위해 뭔가 시도하려는 젊은이들의 의지가 값져 보였다.

78년 지금 자리에 집을 새로 짓기 시작했고 80년까지 주민들이 이주했다. 남은 이들보다 떠난 이들이 더 많았다. 마을의 쇠락은 주민들의 탓이 아니었다. 그런데 주민들에게만 피해를 감수하라고 한다.

회남면 주민들이 피해를 고스란히 떠 안고 대전, 청주권 시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한 지도 26년이다. 그동안 피해 지역민들을 위한 대책이나 사업 지원 등이 왜 없었겠는가. 있었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허리를 펴기가 힘들다.

그들은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사탕 하나 쥐어주는 정책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거교1리 청년회원들은 건고추 판매 사업으로 살길을 찾고자 한다. 나중에는 방아기계도 마련해 고추방아도 직접 찧어서 사업을 확장할 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이들의 숙원이 꼭 실현되길 바란다. 내년에는 풋고추를 살 수 있는 자금 지원이 이루어져 고추건조기가 쉴새 없이 돌아가고, 창고 안에 쌓아둔 건고추가 불티나게 팔린다는 희소식을 듣게 되길 기대해 본다.

할머니 한 분이 한영 이장에게 손전등 건전지와 담배 몇 갑을 사다달라며 돈을 건넨다.

거교2리에 있는 상점까지 가려면 노인 걸음으로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은 필요한 것이 생기면 이장에게 부탁을 하곤 한다.

장날이면 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른들을 모시고 읍으로 향한다. 방앗간에서 기름도 짜고 반찬거리도 사고 두툼한 겨울 바지도 사는 등 장을 다 보면 다시 그 차를 타고 집으로 온다. 볼 일이 길어져 시간이 오래 걸리면 기다려주기도 하면서 서로서로 도우며 살고 있다.

어떨 때는 내 부모처럼 애틋하고 어떨 때는 내 자식보다 더 고맙다.
거교1리에는 '꽃밭님아'라고 불리는 산이 있는데 봄이면 진달래꽃이 만발하다고 한다.

내년 봄에는 분홍빛 진달래꽃이 주민들의 얼굴에도 피었으면 좋겠다.

김춘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