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 맞은 내북면 동산리 주성교회

군내 대한예수교장로회 중 가장 오래돼

2006-11-17     송진선
내북면 동산리 국도 19호선 변에 교회당이 있다.

흔히 작은 교회당이라고 하면 마을 만 위쪽 언덕 위에 하얀색 벽에 빨간색 지붕이 올려진 아담한 교회당을 연상하겠지만 주성교회는 새로 축조돼 외부 규모로 보면 교회의 재정력이나 신도 수 등을 어느 정도 헤아리게 하는 규모이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뾰족지붕, 큰 십자가, 유리창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목자와 어린양의 모습을 모자이크해 어린양을 구원하는 예수의 모습을 담고 있다.

도회지의 교회와 비교하면 작은 교회에 불과하지만 그 역사는가히 놀랄 만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인 주성교회가 내북면에 들어온 지 100주년이 된것이다. 시골교회로서는 상당한 역사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보은에 들어온 역사로는 주성교회가 최고역사를 자랑한다.

기독교란 크리스트를 믿는 모든 종교를 말하고 기독교란 크리스트의 중국식 발음이다.

기독교에는 크게 카톨릭(천주교)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엥그리칸처치(성공회) 오소독소(정교회)로 나눠진다.

우리가 흔히 기독교라고 말하는 개신교가 한국에 입성한 것은 1880년대에 미국을 통해서 들어왔다.

개신교 한국입성이 1880년이고 주성교회 역사 1906년이니 26년 뒤지만 산골에 보은교회 역사 100년이라니….

보은에 삼산초등학교와 회인초등학교가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듯 교회로는 보은교회가 가장 오래됐을 것이라는 짐작을 보기좋게 허문다.

■ 즘말교회로 시작
군내 최고 역사를 자랑하는 주성교회는 1906년 10월27일 처음 내북면 도원리에서 즘말교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됐다.

당시는 일제탄압이 시작된 시기이고 민중들 사이에는 삼신 등 토속신앙과 불교가 이미 그 터를 자리잡은 시기여서 서양 종교라고 하는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기가 너무 척박했던 때였다.

주성교회 100주년사에도 황무지와 같은 주성골이라는 표현을 했을 정도다. 당시 민군 북장로회 계군 선교사를 통해 주성에 들어온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도원리 즘말교회 성전에서 복음을 시작했고 일제의 탄압과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켜왔다.

그리고 1945년 11월20일 동산리로 이전하면서 주성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성전이 없고 신도 또한 없어 이백기씨 집에서 구능성, 조평양, 이만님, 송휘순씨가 겨우 이봉기씨의 인도로 예배를 드린 것이 고작이었다.

말이 교회일 뿐 교회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열악했으며 지금의 규모와 비교하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형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만큼은 탄탄해 1947년 11월 즘말교회 부동산을 매각하고 동산리에 있는 회관을 매입해 개조, 주성교회로 명칭을 변경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9년 다시 교회를 개수해 헌당 예배를 드리고 1955년 비로소 노회 보조를 받아 목조건물로 예배당을 세웠다.

그들의 보금자리,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전당이 세워졌던 것이다. 이후 교회는 신도도 점차 늘어나고 교회 살림규모도 커지는 등 발전했다.

1975년 구 교회 건물을 다시 짓고 1987년 현재도 동산리에 남아있는 흰색 건물의 교회를 지었으며 1995년 비로소 현재의 위치에 예배당을 짓기 위해 1000평을 매입, 98년 기공해 99년 새성전으로 입당했다. 그리고 올해 100주년을 맞은 것이다.

그 사이에 10여년간 주성교회 담임 목사로 재임하며 새 성전 입당을 준비했던 정 민 목사가 퇴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고 2005년 2월 청주 서남교회 부목사로 재직한 이병수(39) 목사가 부임, 현재에 이르고 있다.

■ 100년사 생생한 증언
주성교회 100년사 중 가장 오래된 신자 역사는 김충남씨로 주성교회 권사이다.
처음 종곡교회를 다니다 주성교회 이종덕 집사와 결혼해 주성교회의 신자가 된 김충남씨는 올해로 꼭 49년간 주성교회 신자생활을 하고 있다.

해방 후 주성교회를 다시 시작한 사람 중 중요인물인 이봉기씨가 시아버지이다. 그만큼 주성교회 역사를 꿰고있는 김충남 권사는 꼭꼭 묻어뒀던 50여년사가 가득하다.

지난 9월 김충남 권사를 비롯해 김서구(산외 이식)장로와 이대희(내북 화전)장로가 자리를 같이해 100주년에 대한 방담을 했다.

이날 이들은 불과 20명에 불과한 신자들은 한집안 한 식구처럼 오손도손 살았다며 회고했다. 당시에는 나라도 가난하고 신도들의 형편도 어려워 교회도 당연히 가난했었던 당시를 회고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러면서 처음 주성교회에 여전도사를 모셨을 때 김충남 권사는 여전도사와 함께 살기도 했고 1970년대 새로 교회를 지을 때에는 물자도 부족해 신자들이 아래 마을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 나르고 강변에서 모래와 자갈을 운반해 겨우 지었던 얘기를 들려줬다.

주성교회에 처음 목사가 부임한 해는 1981년이다. 1980년 전도사로 부임했던 우신구 전도사가 81년 목사 안수를 받고 시무한 것. 그 이전에는 모두 전도사가 부임해 교역자로 활동했다.

또한 주성교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목사로 재임해 주성교회 신자 대부분이 기억하고 있는 정민 목사가 처음 주성교회에 부임한 것은 1991년 전도사로 부임한 것이다.

이듬해인 92년 목사 안수를 받고 이곳에서 계속 교역자로 활동하다 93년 목사를 사임, 주성교회를 떠났다. 그러다 96년11월 다시 부임해 2005년 1월15일까지 목회활동을 했다.

■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교회상 정립
교회는 더 이상 신자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교회의 봉사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100년 역사의 주성교회도 지역사회와 함께 가는 사회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어린이 공부방 운영이다. 실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학 등 부족한 과목에 대한 방과후 학습지도를 실시하고 방학 때에는 원어민을 초빙 학생들에게 영어도 지도하고 특별 수업으로 내북초등학교 및 중학교와 연계해 악기를 지도하고 있다.

매년 5월5일에는 면내 전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어린이날 큰잔치를 개최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또한 지역 노인들에게 영양제를 주사하는가 하면 의사와 간호사를 초빙해 의료선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앞으로는 노인학교도 운영해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노인들에게 글을 읽고 쓰는 즐거움을 갖게할 예정이다.

2004년 12월에는 제3여전도회 중심으로 자비량 선교모임을 조직, 9288(국이팔팔)이라는 서비스를 벌이고 있는데 한달에 한번 독거노인 세대와 조손(祖孫)가정 5세대에 반찬서비스를 펼쳐 호응을 얻고 있다.

국이팔팔 서비스는 현재 다섯 가정 밖에 못하지만 참여하는 여전도회 회원들은 앞으로 확대해나간다는 방침이다.

■ 복지관 건설 위해 노력
현재의 위치로 자리를 옮긴 주성교회는 교회 옆 부지에 복지관을 건설하기 위해 논을 매입해놓은 상태다.

100주년 기념으로 신자들이 십시일반 헌금, 부지를 매입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곳을 어린이와 노인들을 위한 섬김의 공간인 복지타운으로 꾸민다는 계획이다.

교역자가 없을 때도 있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던 주성교회가 100년간 하루하루 발전하며 오늘을 이룩했듯이 아직 형편은 안되지만 언젠가는 복지관을 건설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어 늘 희망에 부풀어 있다.

현재 주성교회는 이병수 담임 목사와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가운데 장로는 김서구, 이대희, 정원희, 김영진씨가 재임하고 있으며 권사는 16명, 안수집사 7명이 활동하고 있다.
주성교회는 100주년을 기념해 2006년 10월 두렙돈 창간호를 냈다. 이제 시작이니 앞으로 100년 아니 그 이상의 역사를 그들은 이곳에 담아갈 것이다.

그리고 보은지역에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시작을 알린 주성교회는 다시 차곡차곡 새로운 100년 역사를 쓸 것이다. 지역사회에 구원의 손길을 펼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