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승면 달산1리 - 초생달이 감싸안은 마을 “달미”
2006-07-07 김춘미
이곳을 아직도 달미라 부르는 이들이 있어 이 마을의 풍경이 더 진하게 가슴속에 와 닿는다.
삼승면은 보은을 대표하는 삼승사과를 재배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마을마다 사과 농사를 안 짓는 곳이 없을 정도며 과수 농사는 경지 면적과 농가 소득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달산 1리는 대부분 논농사에 주력하고 있으며 밭이 적기 때문에 사과 재배로 잘 알려진 인근의 우진리, 송죽리, 상가리에 비해 그 규모가 작아 과수농가가 5호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바로 옆 마을인 우진리는 마을이 작은데 반해 젊은이들이 많은데 달산 1리는 마을이 커도 젊은 사람들이 별로 없다며 이달호 노인회장은 안타까워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군에서 운영하는 유아원이 마을에 있어서 인근 마을 아이들도 달산 1리로 유아원을 다녔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65세 이상이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노인들을 위한 시설 마련이 중요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경로당에 건강기구(운동기구)가 없어 주민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되고 있다.
경로당 바로 옆 쉼터가 조성된 공터에는 오래 전 아이들이 타고 놀던 그네며 놀이기구가 그대로 방치돼 있어 씁쓸함을 남긴다.
달산 1리는 양지쪽의 양달말과 음지쪽의 음달말 두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을 돌아 흐르는 작은 도랑을 경계로 집이 남향을 바라보고 있어 항시 따뜻하고 양지바르다는 양달말과 달산 아래 그늘이 지는 음달말로 나뉘어진다.
양달말 앞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는데 아직도 주민들 중 일부는 그 우물물을 사용한다고 한다.
옛날에는 주민 전부가 그 우물 하나로 물을 길어 사용했다고 하는데 물이 마르지 않고 풍부해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도 다른 지역에 가뭄이 심하게 들어도 달산 1리는 가뭄이 들지 않아 벼를 심을 수 있었다고 하니 그만큼 마을에 물이 많아 주민들이 살아가는데 큰 혜택을 받은 셈이다.
달산 1리에서 탄부면 쪽으로 조금만 가면 달산 사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는 정확한 수령을 알 수 없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옛날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보는 각도를 잘만 맞추면 소나무의 멋진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만남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달산 사거리는 보청천을 가로질러 삼승면과 탄부면을 잇는 삼탄교로 이어지는데 삼탄교는 삼승면의 ‘삼’자와 탄부면의 ‘탄’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땔감이 부족했던 시절 주민 한 명이 땔감으로 쓰고자 소나무를 베려하다가 안 좋은 일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소나무는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왠지 달산 1리와 뜻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은 이 소나무가 많은 이들에게 귀히 여겨져 오래도록 뿌리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44호 90여 명이 생활하는 달산 1리는 전기식(55) 이장과 이달호(73) 노인회장, 이종섭(52) 새마을지도자, 서희분(50)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서로 아끼며 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 마을 뒷산이 달처럼 생긴 ‘달미’
달산 1리(達山一里)는 달미 또는 월산(月山)이라는 이름에서 더 친근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보청천 건너 탄부면 쪽에서 바라보면 마을을 감싸고 있는 뒷산의 모양이 마치 달처럼 생겼다하여 ‘달미’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순수 우리말인 ‘달뫼’라는 이름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달미 또는 월산으로 불리다가 달산이라는 행정리명을 갖게 되었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보면 고을 남쪽 20리에 있으며 호수는 22호, 인구는 남자 29명, 여자 32명 마을 이름은 지금과 같이 달산리라 하여 당시 삼승면에 속한 9개 마을 중에 하나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달미, 이름만 들어도 남다른 느낌으로 와 닿는 지명 유래 때문인지 마을에는 달과 같이 잘 생긴 미인이 많이 출생할 뿐 아니라 여자들이 심성과 외모가 고와 마을에 덕이 된다고 한다.
# 인천 이씨 집성촌
달산 1리는 인천 이씨 시중공파(달산파) 집성촌으로 조선 중기 청도군수를 지낸 이세정의 후손들이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44호 중 몇 가구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대부분이 인천 이씨라고 한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으나 여전히 인천 이씨 집성촌의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타성들과 함께 한 집안처럼 더불어 살고 있다.
처음에는 상가리로 이어지는 재지골이란 곳에 터를 잡고 자손들이 번성해 풍족하게 살았는데 그곳에 화기(火氣)가 드세 불이 자주 났었다고 한다. 그러나 물이 부족해 불을 끄기 어려워 옮겨온 자리가 지금의 양달말, 음달말이라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옛부터 학문을 중요시 여겨 달산옹 이장형, 하천옹 이원형은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쳤으며 많은 출향인들이 그 명성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뿐 아니라 남다른 효성으로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된 인물도 많아 효자마을이란 이름을 얻은 달미 마을이기도 하다.
# 좋은 자연 조건
달산 1리는 경지면적 중 대부분을 논이 차지하고 있다.
토질이 좋은 황토와 더불어 물이 많은 지역이라 논농사를 짓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약 46㏊에 해당하는 논이 마을 앞으로 펼쳐져 있으며 농업용수로 이용하는 보청천이 탄부면과의 사이에 시원스레 흐른다.
아무리 땅을 파도 자갈 하나 나오지 않는 양질의 황토 때문에 '달산 처녀가 시집을 가서 아이 셋은 낳아야 고무신에 황토물이 빠진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라고 한다.
농부에게 땅이 좋다는 것은 더없이 큰 축복이다.
더군다나 그 좋다는 황토에 농사를 지으니 거기에서 생산하는 농작물의 품질도 우수할 것이다. 달산 1리에서 수확하는 쌀은 미질이 좋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좋은 토질과 풍부한 수량 덕분에 농사를 지으며 많은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한때는 ‘원남에 메밀꽃이 피어야 달산에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마을에 수량이 풍부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넓은 들과 지형이 사람살기에 너무나 좋아 보여 탄부면 대양리 쪽을 지나던 도선이 아홉 번이나 돌아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달산 1리는 내년에 상수도와 하수도 설비를 함께 할 예정이다. 상수도 공사 계획이 먼저 잡혔으나 좀 늦더라도 하수도 설비와 공동으로 하는 것이 경비 절감 등 더 좋을 것 같아 내년으로 미룬 것이라고 한다.
마을 안으로 흐르는 도랑은 폭이 좁고 높이가 낮아 장마 때면 물이 넘쳐 주민들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상가리 쪽에서 내려오는 물 양이 상당해 그대로 방치해 둘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더 큰 문제를 낳기 전에 조속한 조치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겨울뿐 아니라 여름에도 경로당에 모여 점심도 해먹고, 함께 담소도 나누며 하루하루 주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달산 1리 주민들.
수확한 감자 한 박스를 경로당에 모인 주민들 쪄 먹으라고 갖다줬다는 이달호 노인회장의
말끝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감자가 생각나 군침이 돌았다.
경로당을 돌아보는 동안 여럿이 모여 앉아 찐 감자를 맛있게 먹는 주민들 모습이 눈에 정감 있게 그려지는 달산 1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