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백여 년 이어온 박씨 집성촌

마로면-변둔리

2006-06-23     김춘미
이른 비와 늦은 비로 곡식들이 알을 채워가고 있는 여름철, 변둔리를 찾은 날도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마을을 적시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오를 듯한 시루봉과 12폭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벼슬봉 아래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다 그리움에 떨구어 놓은 눈물같이 내려앉은 산들.

그 아래 300여 년 동안 이어온 밀양 박씨 집성촌인 변둔리가 자리하고 있다.

시루봉은 마로면의 갈전, 세중, 변둔리 등 여러 마을에 걸쳐있는 산으로 옛날옛적 물이 마을을 덮쳤을 때 다 잠기고 물 위로 봉긋 솟아 있던 산꼭대기가 꼭 시루가 떠있는 것 같았다 하여 시루봉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밀양 박씨가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박성용 이장의 13대 할아버지 형제가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충북 영동에서 살다가 옥천군 청산면 예곡을 거쳐 지금의 변둔리로 들어와 손을 퍼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변둔리에 처음 터를 잡은 이들은 원래 박씨가 아닌 김씨로 지금도 마을에는 김씨들 산소가 많이 있다고 한다. 김씨들이 다 떠나고 난 뒤 박씨들의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박성용 이장은 밀양 박씨 국단파의 시조인 국단 할아버지가 자신의 가장 큰 소원은 자손을 많이 퍼트리는 것이라고 해서인지 특별히 잘 된 사람은 없어도 자손들은 많다고 했다.

지금은 전체 27호 중 20호가, 전에는 70호 중 50여 호가 박씨였다고 한다.

변둔리는 멋두니라고도 불리는데 명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제방이 생겼는데 옛 어른들이 마을에 ‘못둑’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예견해 못둑니라 한 것이 오랜 세월 변천 과정을 거치면서 변둔리가 된 것이 아닌가 짐작하는 이도 있다.

변둔리는 예부터 피난지로 유명한 곳이다.

주민들이 많았을 당시에는 피난민들도 상당수를 차지했으며 바로 인접해 있는 경북 지역에서 전쟁으로 난리가 났어도 변둔리는 평화로운 동네였다고 한다.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그곳에서 한 400여 명이 소속된 인민군 1개 대대가 몰살을 당했는데도 전혀 모를 정도였으며 변둔리 주민들은 무사히 난리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변둔리 마을봉사자로는 박성용(49) 이장과 박희춘(75) 노인회장, 박우용(46) 새마을 지도자, 이경남(56) 부녀회장이 있다.

# 주막거리가 있던 교통의 요지
버스를 타고도 산길을 돌고 돌아 한참 만에야 만날 있는 곳 변둔리. 이 먼 길을 옛 사람들은 어떻게 걸어다녔을까.

옛날에는 상주에서 보은이나 옥천을 가려면 반드시 이곳 변둔리를 지나가야 했다고 한다. 마을 앞을 지나는 2차선 도로가 큰길이었던 것이다.

험난한 속리산 줄기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넘어온 길손들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던 변둔리에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오래 전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남도의 보부상들이 이곳에 들러 하룻길의 피로를 탁주 한 잔으로 풀며 머물다 간 곳.
지금은 교통의 요지가 아니라 오지(奧地)가 되어버렸지만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일부러 찾아갈 일 없는 마을이어도 옛날에는 그곳을 찾는 이들로 마을이 활기를 띠었다.

주막거리도, 활기를 띠던 사람들의 모습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주막거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한 교통의 요지였던 변둔리의 옛날 이야기는 계속 전해질거란 생각이 든다.

# 300년 된 정자나무가 있는 조상거리
변둔리 마을 안쪽 안동네 입구에는 조상거리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길옆에 수령이 300여 년이나 된 정자나무가 몇 그루 있으며 한여름 농사로 지친 주민들의 피로를 풀어주고 더위를 시원하게 식혀주는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 회관을 새로 건립하기 전에는 그곳이 주민들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정자나무는 마을의 상징물로 보호되고 있다. 고목이어서 인지 나무 안이 텅 비었었는데 톱밥을 집어넣는 등 관리를 한 덕에 지금은 수세가 많이 좋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조상거리에서는 정자나무뿐만 아니라 돌 하나하나 쌓아올려 만든 서낭계의 돌무리도 볼 수 있다. 현재 마을에서는 그곳에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고 한다.

# 인정으로 사는 마을
집성촌으로 몇 백 년 동안 마을을 이루며 주민들 서로 간에 가족관계를 형성해 왔기 때문인지 변둔리 주민들의 화목하고 화합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으로 다가온다.

몇 년 전부터 못자리를 할 때면 마을 공동으로 일을 해준다고 한다. 못자리를 하는 농가들이 전부 모여 회관에서 밥을 하는 밥 당번만 두 명 남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못자리 터로 나가 일을 한다.  놉을 얻거나 품앗이로 할 때는 끼니며 새참, 간식 등을 마련하는 경비도 많이 들뿐더러 일하는 시일도 많이 걸려 주민들이 마을 공동으로 하기로 합심을 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경비 절감과 일의 능률 향상, 작업기간 단축(전에는 5일 하던 일이 3일이면 끝난다고 한다) 등 많은 효과를 봤기 때문이다.

또 초복에는 마을에서 삼계탕과 돼지고기 등을 준비해 전 주민이 모여 복 달음을 하고, 대보름에는 윷놀이로 화목을 다진다고 한다.
“사람들 간에 공동체 의식이 잘 돼 있어요. 우리 마을은 인정으로 사는 마을이라니까요.”

자신 있게 마을 자랑을 하는 박성용 이장의 말이었다.

자랑이란 나도 좋고 상대방도 좋아 같이 입을 맞춰 자랑거리를 높이는 것이 자랑이다. 나만 좋고 상대방은 움츠러들게 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이웃을 위해 물 한 사발 건네는 인정이 너두 나두 모두 좋은 변둔리의 자랑이며 각박한 세상, 살맛 나는 풍경이기도 하다.

예전만 못하다는 우리네 인심이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제일의 자랑이 될 수 있도록 회복되길 기대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 맛 좋은 쌀 생산
비농가를 제외한 17호 농가들은 대부분 논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다. 변둔리는 논농사가 경작 규모의 7, 80%를 차지하며 고추, 축산 등 전형적인 복합영농을 하는 마을이다.

마을로 들어서면 큰 규모의 대파 밭을 볼 수 있다. 한 농가에서 심어놓은 것으로 대파가 만평이나 된다고 한다. 그것에서 알 수 있듯 10명이 조금 넘는 60대까지의 변둔리 주민들은 1가구 당 경작 면적이 7000에서 1만평으로 인근 마을인 갈전리에 농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특히 일교차가 심해 수확한 쌀의 당도가 높아 변둔리 지역에서 수확한 쌀을 한번 먹어본 사람은 다른 제품은 맛이 없어 못 먹을 정도라며 맛 좋은 쌀 생산이 주민들에게 많은 득이 된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판로를 개척해 거래를 하는 주민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변둔리에는 한 가지 걱정이 있다. 마을에 쌀을 건조할 수 있는 건조기가 없는 것이다. 건조기의 필요성이 절실해 면에 신청을 했었지만 의회에서 예산이 삭감돼 실현되지 못했다.

변둔리 주민들은 건조기가 없기 때문에 쌀을 수확하면 태양 건조를 한다. 어쩌면 자연에서 말린 것이라 기계로 말린 것보다 쌀이 더 맛있는 건지도 모른다.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주민들이 태양 건조를 하는 장소는 차가 오고가는 도로변이다. 그렇다보니 사고가 날 위험이 항상 뒤따르고,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고, 널어놓은 벼를 누가 가져가진 않을까 하는 불안심리가 작용해 주민들이 맘 편히 벼를 말릴 수가 없다.

얼마 전에는 경미하긴 하지만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의회에서 어떤 연유로 예산 삭감을 통과 시켰는지는 모르나 변둔리 주민들에게는 해결되어야 할 가장 절실한 문제이기에 함께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었다.

박성용 이장은 국가에서 농촌에 대한 지원이 있기는 하지만 농민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고, 농민들을 진정으로 돌아보는 혜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다.

변둔리 젊은이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광업소나 농공단지 등 직장까지 다니고 있으며, 그 많은 농사지으랴, 직장 다니랴 하루하루 바쁘지만 그렇게 부지런을 떠는 덕에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변둔리는 마을 밖 도로변에 바람이 많이 불어도 조상거리에 있는 정자나무와 마을 뒷산이 바람을 막아주어 마을이 훈훈하다고 한다.

인정으로 사는 마을 변둔리. 동네가 사람을 닮은 건지 사람이 동네를 닮은 건지, 동네가 아늑해 참 살기 좋은 곳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