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수 당선자 이향래 … 그는 누구인가

도전정신·끈기·배짱있는 인물 정평

2006-06-02     보은신문
3전4기로 보은군수 자리에 오른 이향래(57) 군수 당선자. 그의 지역의 수장이 돼 지역발전을 꾀해보자는 꿈은 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작은 도의원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이번 군수 당선까지 역사를 우선 더듬어 본다.

그는 1990년 2월 마로농협 조합장에서 퇴임한 후 당시 40세에 민주당 후보로 도의원 1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러나 민자당의 박상호 후보에게 보기좋게 미끄러졌고 1995년 선거에 재도전 민주당 후보로 1선거구의 도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 바람이 불었듯이 당시 민주당 바람이 불었고 이향래 후보는 45세에 당당히 도의회에 입성했다.

4년간 농림수산위에서 의정활동을 했고 후반기에는 초선이면서도 농림수산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도의원을 지낸 그는 1998년 선거에 처음 보은호의 선장이 되기 위해 군수 선거에 입후보 했지만 결과는 낙선, 2002년 선거에도 도전했으나 박종기 군수에게 뒤지고 말았으며 4년간 군수 도전의 꿈을 접지 않고 와신상담했다.

그 결과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는 2002년 선거에서 결과와는 완전히 다른 자신에게 패배를 안겼던 박종기 군수를 압도적인 표 차로 이겼다.

◆ 학업 꿈접고 농사를 짓다
보은호의 선장으로 당당히 보은읍 이평리 산 45번지 보은군청에 입성하게 된 이향래 당선자는 1950년 마로면 기대리에서 이윤달(작고)씨와 원춘희(80)여사의 4남4녀 중 네째로 태어났다.

현재 부산에 있는 대학의 학장인 큰 형 이승래씨와 작은 형 등 공부를 잘하는 형님들 뒷바라지 때문에 그는 보덕중학교만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며 어린 나이에 논갈고 밭갈고 농사지어 형님들 공부 뒷바라지를 하는 농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면서 4-H 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리더십을 발휘 마을 4-H 회장과 마로면 4-H회장을 거쳐 68년 4-H 군연합회장이 됐다.

군 제대 후에도 도시로 나가 직장을 잡는 대신 그는 상록수를 심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고 4-H와 새마을지도자 활동을 하면서 외부인들과 접촉이 많았고 교육을 받는 기회도 많아져 그는 전통적인 농사보다는 새로운 농업, 새로운 작물재배에 도전하는 모험을 하기도 했다.

6000평의 농사거리가 있었던 당시 그는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수확해야 늦가을 또는 겨울에나 푼돈이지만 돈을 만지게 되고 1년 농사 지어봤자 형님들 학비 뒷바라지도 어렵고 목구멍에 풀칠도 여유있게 하는 형편이 안되자 이 것 저 것 특용작물을 시도했다.

달리기도 잘하고 씨름도 잘했으며 공차기도 즐겼던 17살 고등학교 1학년인 나이에 등짐으로 똥장군을 져 참외를 기르기도 했고 배추, 옥수수 등 별의별 것을 다 지었다.

하얀 칼라를 세운 여학생이나 모자를 쓴 남학생을 보면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이 없고 스스로 열등감을 갖기도 했지만 가정형편상 어쩔수가 없어 농사에 매달렸다.

경운기 하나 가득 배추를 싣고 관기 장에 가서 팔면 고기 1근, 소주 1병 먹을 돈도 안될 정도로 돈이 되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것마다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남들의 학창시절을 논에서 밭에서 보낸 그는 마을이장을 보던 30살에 보은 대홍수인 80년 마을 140호 중 42집이 큰 수해를 입었고 완벽하게 수해복구를 하자 농협 일을 해보라는 주위의 권유로 31살 때 조합장 선거에서 1위 전국 최연소 조합장 당선을 기록했다.

◆ 군부독재 조합장 인정 안해
하지만 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로 4-H 활동을 함께 했던 산외면의 김태형씨가 농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때이고 그도 농민당 당원으로 선거운동을 하던 때였고 나이가 젊다, 중졸이다는 이유를 대며 조합장 승인이 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조합장 승인이 나지 않는 것에 거세게 항의했지만 더 이상 하다간 삼청교육대에 갈 형편으로까지 상황이 악화되고 보은우체국 차석이었던 아버지에게도 화가 미쳤다.

군사정권은 아버지에게 아들이 농민당을 탈당하면 국장까지 시켜주겠다고 협박 반 아버지를 괴롭혔고 결국 아버지는 54살 때 화병으로 1년간 우체국까지 휴직하는 상황이 됐다.

복직 후 정년퇴임까지는 갔으나 환갑도 못 채운 59살 때 그의 아버지는 사망했다. 이향래 당선자는 자신때문에 아버지가 화병을 얻어 오래 사시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32살 때 조합장을 포기하고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지금 30살인 큰 딸 현희씨는 기대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또 81년 조합장 임명을 못받고 82년 후계자로 지정돼 한우 입식자금을 받아 기대리 강거리 1만여평의 임야에서 임간 방목으로 송아지를 사육했다.

당시 마리당 120만원에 입식한 송아지가 2년 후에는 마리당 6, 70만원으로 폭락했다. 이같이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아무리 땀흘려 농사를 지어도 땀흘린 만큼 좋은 품질 만큼으 가격을 받지 못하고 항상 손해만 봤다.

◆ 경기도에서 낙농을 보다
이것을 처절하게 경험한 그는 농협 조합장이 되면서 농가의 부 창출을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34살에 6대 마로농협 조합장에 당선된 후 7대까지 2선을 한 그는 그런 과정을 거쳐 낙농을 도입했다.

4-H 시절 상록수를 심겠다는 자신의 꿈을 그는 농협 조합장이 되면서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낙농을 도입한 것. 도시외곽지역외에 농촌지역에선 불모지인 낙농을 마로면에 도입 11가구에서 낙농을 시작했다.

선진지 견학과 유능한 강사를 초빙해 교육도 시키고 농협 융자금으로 입식자금을 지원했다. 한때 낙농 파고를 겪자 농가에서는 그 때문에 빚만 졌다고 소를 몰고와 항의하는 등 소동도 겪었지만 어려움을 잘 극복해 지금 마로낙우회는 1년 전체 매출이 보통 중소기업 매출과 맞먹는 등 농가의 소득원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가 탄생시킨 마로낙우회는 지금 군내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그도 강원도 평창에서 송어양식을 하는 것을 보고 평창과 지하수, 산악지대인 것 등 지형조건이 같아 87년 군내에서는 처음 송어 양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89년에는 식당도 개업해 영업하면서 소득도 높였다.

또 87년 논에 잉어를 방생하는 친환경 농법을 도입했는데 농약을 치지않는 농사로 도시민들에게 비싸게 쌀을 파는 등 획기적인 방법을 도입해 눈길을 끄는 등 신사고 정신으로 농사를 짓는 유명인이 됐다.

이렇게 항상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도전정신으로 농업분야를 개척하던 그는 98년 지방선거에서 낙선하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다.

◆ 98년, 수해·낙선·자녀교육으로 고난
당시 선거에 낙선해 돈도 다 떨어졌고 수해로 송어장과 돼지 막사가 떠내려 가는 등 큰 피해를 입었을 때였는데 당시 슬하의 1남3녀 중 큰딸 현희씨가 충북대 4학년, 둘째 딸 현진씨는 혜천대 2학년, 세째 아들 현민씨가 충남대 1학년에 재학 중이어서 등록금만 500만원 이상이 들어갔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그는 수해복구도 완료하고 자녀들도 대학공부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2002년 군수선거에서 낙선한 후 그는 마음을 다잡아 충북과학대 입학을 감행했다. 선거 후여서 등록금 낼 돈이 없자 한번은 형님이 등록금을 주고 한 번은 제수씨가 등륵금을 주는 등 형제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대학도 졸업했다.

술과 담배를 끊고 동네 뒷산인 울무산도 등산, 매일 큰돌을 가져가 십자가 모양의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울무산 정상에서 보이는 보은읍내를 보며 군수의 꿈을 다졌다. 그렇게 4년을 보낸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군민들에게 호소 결국 군수 당선자로 화려하게 등극했다.

“그동안 말없이 집안을 건사하고 내조한 부인에게 고맙고 특히 어머님의 기도의 힘이 컸고 아이들도 크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며 이향래 군수당선자는 군민의 성원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군수가 되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7월1일 임기 시작의 민선4기 보은군수가 되는 이향래 당선자는 부인 이교순(55)씨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