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북면 눌곡리

영해 박씨 목사 공파의 집성촌 눌곡리

2006-05-12     보은신문
눌곡리(또는 늪실)는 뚜렷한 마을명의 유래가 전해져 내려오진 않고 있지만 한 주민의 말에 따르면 신라 눌지왕 때 마을이 형성되어 왕(눌지왕)의 칭호에서 앞자를 따 ‘눌곡’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고도 한다.

늪실은 눌곡리의 으뜸되는 마을이며 늪실 동쪽에 있었던 마을인 가달피는 구들티가 변한 것으로 영해 박씨 선대의 재실과 관리인이 살았었다고 한다. 늪실 중앙에 흐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양지말과 음지말이 있으며 옛날에는 몇 가구가 살았던 오가리는 현재 풍림정사만 남아 있다.

눌곡리는 마을 뒤에 자리한 여러 개의 산과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물과 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늪실 마을을 품고 있으며 정상에 호랑이가 살았다고 하는 사자봉(獅子峯)과 하마봉(下馬峯)아래 마을이 위치하며 풍림정사가 있는 풍림산(楓林山)은 들에서 바라보면 큰 새가 양 날개를 펴고 서 있는 모습에 단풍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고 마을 입구에서 보면 소의 안장과 같다하여 우암봉이라고도 부른다. 이밖에 갈마봉(渴馬峯)과 구평산(九坪山), 똥그락산(둥글게 생겼음), 마봉(馬峯) 등이 있다.

삼막골 정상에는 500평 가량의 대문너머라는 연못(대못)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 있는 거리인 탑거리에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와 돌탑이 있다.

마을봉사자로는 박재수(59) 이장과 박병관(77) 노인회장, 박병우(44) 새마을 지도자, 변경옥(48) 부녀회장이 마을일에 애쓰고 있다.

# 영해 박씨 목사 공파 집성촌
마을 전체 가구 수 중 2가구를 제외한 70여 호 정도가 전부 영해 박씨인 눌곡리.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처음 박씨 집성촌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며 주민들 대개가 옛 신라의 만고 충렬 박제상공의 후예라고 한다.

몇 백 년 동안 영해 박씨 목사 공파 집성촌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눌곡리는 14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과거에는 집성촌이었다 하더라도 이농현상 등으로 규모가 축소되었거나 각성바지들이 많이 자리를 잡은 타 마을에 비해 눌곡리는 여전히 집성촌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재실이 있었던 가달피에 청원~상주 간 고속도로 진입로가 생기게 되어 마을 안에 지금의 사당을 다시 지었으며 해마다 시향를 모시고 있다.

눌곡리는 마을소유의 땅으로 답(沓)이 50마지기, 종중 땅이 50마지기 정도나 된다. 마을 땅은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농사를 짓고 그 수입으로 마을 기금 및 기타 경비를 충당한다고 한다.

마을 안팎의 수령이 400년 이상 된 거목 느티나무처럼 집성촌의 오랜 역사를 가진 눌곡리는 그 긴 세월 동안 사회 각 분야의 요직을 맡고 있는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으며, 긍정적인 발전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것이 부질없는 일이 아닌 주민들에게 언제나 흐뭇한 일이 돼주었으면 한다.

# 주민들의 편안한 쉼터 세심지 공원
눌곡리 마을 입구에는 몇 백 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그 주변에 넓은 공원이 조성돼 있다. 주민들은 그곳을 세심지(洗心池)라 부른다.

마을 주민인 박근수(74)씨의 말에 따르면 그의 11대, 12대 할아버지 묘가 마봉(모봉)에 있는데 산의 형상이 꼭 할아버지 묘가 말을 탄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 말이 쉬어서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아 땅을 파내 연못을 만들었고 지금의 공원이 있는 자리가 원래 세심지가 있던 곳이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주민들이 활기차고 적극적이어서 마을이 항상 깨끗했었는데 노령화가 되다 보니 마을 주변을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돼버렸다. 연못에 낙엽이 쌓이면 척척 거둬내고 청소하던 손길들이 쇠해져 세심지가 깨끗하게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주민들은 하는 수 없이 연못을 메우기로 했고 현재 세심지라는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자연이 살아 숨쉬는 녹음(綠陰) 아래 자리한 눌곡리 마을 공원은 앉아서 쉬고 싶고 운동할 맛 나고 예쁜 경치 때문에 눈길이 가는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장소다.

# 박문호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풍림정사
풍림정사는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보은이 낳은 대표적 사상가인 호산 박문호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강당이다. 충북도 지정 지방 기념물 제 28호인 정사는 회북면에서 회남면 방향의 눌곡리(오가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이곳 출신인 박문호 선생이 낙향하여 고종 9년(1872)에 세운 것으로 정면 6칸 반,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구조는 우측 1칸은 부엌이고 2칸은 온돌방으로 방 앞은 툇마루를 놓았고 2칸은 강당으로 정마마루를 깔았다.

‘풍림정사(楓林精舍)’란 편액은 입재 송근수의 글씨이고, ‘풍림정사기(楓林精舍記)’ ‘풍림강업서(楓林講業序)’‘여담간명서(麗潭間銘序)’ 등의 현판과 회암의 ‘연비어약(鳶飛魚躍)’의 글씨 현판이 있으며, 박문호의 문집인 《호산집》의 판본과 목활자 일부가 남아 있다.

정사 뒤쪽에는 1906년(광무 10)에 세운 후성영당(後聖影堂)이 있는데 주자(朱子),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한원진(韓元震)의 모사본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던 곳으로 1921년 박문호의 영정을 추가 봉안하였다. 박문호의 영정은 그의 64세 때 모습을 이춘화가 1912년에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한다.

영해 박씨인 박문호는 한말 개화기의 수난 속에서 과거를 단념하고 초야에 묻혀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했다. 이곳은 1979∼1980년에 도비로 보수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정사 앞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운치 있는 멋을 더해준다.

# 마을에 보탬이 되는 금강수계주민지원사업비
눌곡리는 상수원 보호 구역으로 금강수계주민지원사업비를 받는 마을이다. 작년에는 트랙터 1대를 올해는 이앙기 1대와 콩 타작하는 기계 5대를 지원 받았다. 농기계가 없는 농가에서는 필요할 때에 다른 농가에서 기계를 빌리는 수고를 덜 수 있어 좋고 마을에 보유하고 있는 농기계가 있으면 주민들이 걱정 없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어 주민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외에 농로 포장도 잘 되어 있었다.

대청댐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고 농경지를 잃고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을 더 많이 안고 살아가는 마을은 우리에게 아픈 현실이다. 그래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어 그나마 주민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

눌곡리는 밭보다는 논이 많아 앞으로 벼를 보관할 수 있는 마을 창고 건립과 주차장 마련을 주민들은 숙원사업으로 계획하고 있다.

청원∼상주 간 고속도로 공사로 눌곡리의 전답도 많이 매입되었다고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민들의 불만은 없었냐는 물음에 박재수 이장은 “정부사업인 만큼 국가 정책에 따를 뿐이다. 그리고 주민들도 공사가 잘 진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민은 국가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국민은 국가가 발전하길 소망하고 국력이 튼튼해지길 바란다. 국민은 국민 모두가 잘 살기를 꿈꾼다. 그러기 위해 국민은 국가를 돕고자 한다.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정책을 펼치는 정치가들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정치가들도 국민이다. 그들이 국민다운 마음을 버리지 않아야 정치가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눌곡리에 하수 처리장을 시설할 당시 주민들이 마을 땅을 부지로 희사했다고 한다. 마을을 위한 좋은 일에 힘을 보태는 주민들의 사려 깊은 마음씨가 엿보였다. 그 덕분에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물이 깨끗해 여름이면 청주, 대전 등지에서 찾아오는 피서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한다.

수 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와 탑거리의 돌탑, 풍림정사의 멋을 즐길 수 있는 곳 눌곡리. 세심지 공원의 자연미와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돌담길이 살아있어 마을 안을 거니는 발길이 심심하지 않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오래된 우물가도 3개나 볼 수 있었다.

눌곡리를 왜 취재지로 선택했냐고 묻는 주민들.
산아래 인가 한 채만 있어도, 흔히 볼 수 없는 거목 한 그루만 있어도, 작은 오솔길만 나 있어도, 사람은 오솔길을 걷다가 거목 한 그루를 발견하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눌곡리를 왜 취재하러 갔냐구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그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
김춘미 프리랜서

<새로쓰는 마을 이야기(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