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素心)
서흥복(내속 중판, 수정초등학교 교장)
2000-05-06 보은신문
난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심미의 감각과 고전의 향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내가 난을 좋아하는 이유는 난에서 풍기는 추상성 때문이다. 작은 화분 속에서 겨울을 잉태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맑고 순박한 꽃의 색채가 하늘거리면서도 강인한 잎의 선과 합쳐 범할 수 없는 기품을 뽐내는 것을 바라보느라면 나도 모르는 이상형의 세계에 몰입하곤 한다.
산행을 하러 불갑사에 갔을 때였다. 산을 잘못 들어 자갈 밭을 건너게 되었다. 자갈에 발이 밀려 주루룩 미끄러지다가 다행스럽게 나뭇가지를 잡고 간신히 멈췄다. 그 때 나무 뿌리 속에서 꽃 한송이가 눈에 띠었다. 잎은 토끼가 다 뜯어 먹어 앙상한 잎 줄기 속에 새하얀 긴 혀를 내민 꽃 한송이, 소심이었다. 자갈 밭 돌틈의 굵은 나무 뿌리에 뒤엉켜 사느라 어지간히 고생을 한 것 같았다. 장원했다고 소주 한 잔 기울일 때 다른 날보다 소주 맛이 더 좋았던 것도 그 소심 덕분이었다.
나는 난중에서도 소심을 가장 좋아한다. 내가 소심을 가장 좋아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잇다. 그 첫째 이유는 소심에게서 순수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무늬가 화려한 유색화를 명품으로 치지만 소심은 난의 기본 특성을 유지 하면서 서민적이고 해맑은 웃음이 순수 그대로의 자태를 지니고 있다. 성철 스님의 `물은 물, 산은 산' 이라는 명언을 소심에게서 느끼기 때문이다.
그 둘째 이유는 소심은 무욕의 경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심은 꽃의 빛깔이 백색 외에는 엽록소 밖에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판, 부판, 봉심에는 물론 설판에도 점이나 얼룩이 없고 깔끔할 뿐만 아니라 티없는 담백한 꽃에서 욕심 없는 동심을 느끼게 한다. 일타 스님의 `집착을 버리면 성공이 보인다'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그 셋째 이유는 소심에게서 자유의 지성을 배우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무늬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꽃을 난의 명품이라고 하지만 소심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새하얀 도화지 그대로의 모습 속에서 자유와 지성이 함께 하는 것을 배운다. 모두가 바쁘고 어려운 생활이지만 소심의 새하얀 자태에서 여유와 향수, 생활의 낭만과 삶의 지혜를 배웠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다.
<정이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