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외면 봉계리 구순의 권태홍옹

북쪽 74세 큰아들과 상봉 "죽어도 여한이 없다"

2006-03-10     송진선
19세 학구파 큰아들의 생사도 모른채 살다가 최근 북쪽에 산다는 적십자의 소식으로 감격의 상봉을 한 산외면 봉계리 권태홍옹.

2월28일 적십자사에서 화상상봉으로 죽은 줄만 알았던 큰 아들 권영국(75)씨를 만나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권옹의 가족들을 4일 만났다.

이날 화상상봉에는 권옹의 작은 아들이면서 그동안 큰아들 역할을 해온 권영부(65)씨와 두 딸, 며느리가 동행했다.

혼자는 한 발자욱도 움직일 수 없는 권옹은 휠체어에 의지해 꿈에 그렸던 큰아들을 만나 그리움에 대한 회포를 풀고 화면으로나마 만난 것에 만족했다.

북쪽의 권영국씨는 맏이로서 부모님을 못 모시고 권영부씨가 모시게 해 미안하다며 장남으로서 책임감을 나타냈고 또 상봉장에 어머니가 없자 "나를 끔찍하게 사랑했던 어머니는?"하고 물었고 "오빠(형)을 잃고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고 속을 끓이다 40년 전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동생들의 말에 흐느꼈다.

1951년 6·25 전쟁 후에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 종로에 거주 당시 육군 기술장교였던 아버지 권태홍씨를 잡기 위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집을 습격했으나 아버지가 없자 당시 열 아홉살로 경성공고를 재학 중이던 큰아들 권영국씨를 잡아간 것.

이후 가족들은 인민군에 의해 끌려간 큰아들은 소식이 감감해 큰아들 권영국씨를 사망 처리했다.

그러다 남북 이산가족 면회가 다시 이뤄지며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권영부씨는 큰 형님이 살아있는지 적십자사에 문의를 했고 올해 2월 북쪽에 생존해 계신다는 연락이 왔고 이번에 비로소 화상으로나마 만남이 이뤄지게 됐다.

권영부씨는 10살 차인 큰형님과 55년 만에 만남 것인데 어릴적 봐왔던 형님의 인상이 남아있었다고 전했다.

이렇게 55년간 생사조차 모르고 지냈지만 피를 나눈 형제여서 인지 텔레파시가 통한 것인지 현재 북쪽의 큰 형님 권형국씨와 남쪽의 권영부씨는 이상하게도 똑같이 아들하나, 딸 하나를 두었고 아들 이름도 똑같이 권오성을 쓰고 있다.

그래서 화상상봉장에서 역시 피를 나눈 형제여서 그런가보다고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약 2시간 가량 상봉을 한 이들은 이렇게 남북이 갈린 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운명으로 생각하자고 서로 위로하며 금강산에 상시 면회소가 생기면 자주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일본 선박회사에 근무하며 외항선을 탔던 서울 종로 본토박이 권영부씨는 8년전 산외면 길탕리 탕골 농원에 들렸던 것이 인연이 돼 아예 산외면 봉계리로 이사를 왔다.

합병증까지 왔을 정도로 당뇨병을 심하게 앓았던 권영부씨는 보은으로 이사를 오지 않았다면 생사를 달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공기좋고 물 맑은 청정한 보은에서 살면서 지금은 크게 호전됐다고 한다.

현재 밭 300평, 논 300평을 임대해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는 권영부씨는 맏며느리 아닌 맏며느리로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를 모셨고 시동생 들까지 모두 출가시켰다.

그리고 1년 열두달 방안에 누워만 있어 쾌쾌한 냄새가 날 수도 있는 시아버지 방에서는 ‘노인냄새’가 나지 않을 정도로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즐겁게 봉양하는 부인 박정자(59)씨에게 가장 감사하다고 말한다.

북쪽의 큰아들 권영국씨도 자신이 해야 하는 역할을 동생이 도맡아 해 큰 시집살이를 한는 것에 미안해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