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공예의 맥은 이어가야한다.

짚으로 만들어 쓰던 생활도구들이 거의 다 사라져, 보전대책 강구해야.

2006-02-11     서장원
귀사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오랜만에 기고합니다. 혹시 원고량이 많으면 편집자께서
적절하게 줄여서 게재해도 괘찮습니다.
.....................................................

1월 27일자 보은신문(771호 1면)에 ‘우리 솜씨 어때요’란 제목으로 산외면 산대2리 노인회원들이 짚공예로 농한기를 유익하게 보내고 있다는 반가운 기사를 접했다.
더군다나 멀리 고향을 떠나 있는 입장에서 우리의 옛것을 되살려 건강도 다지고 짭짤하니 수입원도 된다니 흐뭇하기 그지없다. 이곳 어르신들이 만드는 맷방석, 삼태미, 둥구먹, 가마니, 꺼치, 닭둥우리 등은 우리의 주변에서 대부분 사라진지 오래다. 간혹 시골 어느 농가에서 쓰임새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혼과 정신을 잇는 차원에서도 짚공예의 기능은 살려 나가야한다. 그런 면에서 산대1리의 사례는 높이 살만한 모범사례다.

*짚은 조상들의 생활의 모든 것이였다.*
볏짚은 우리 겨레와 아주 가깝다. 우리는 삼신짚 위에서 태어나 초가집에 살면서 벼농사를 짓고 짚으로 새끼 꼬고 멍석을 짜면서 살다가 가난하게 죽으면 거적에 둘둘 말려 草墳으로 돌아가야 하는 지푸라기 같은 힘없는 존재였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볏짚은 땔감, 여물, 퇴비, 공예품 등 여러모로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볏짚을 구경하기조차 어렵다. 축산농가에서 되새김용 조사료로 사용하는 외엔 논바닥에 그냥 내버려둬 퇴비로 쓰는 지경에 이르다 보니 더욱 그러하다.
그런 마당에 가마니, 멍석, 소쿠리니 하는 소위 藁工品은 농촌 현장에서도 볼 수가 없고 초가지붕은 민속마을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는 희귀한 骨董品이 돼 버렸다.
그러나 우리의 고유 민속을 전승하고 전통문화를 잃지 말고 후대에 전하도록 하는 것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 기성세대의 책무라고 본다. 아무리 우리의 민속 고공품이 현대생활에 어울리지 않고 비효률이고 비과학적인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 실생활 속에서는 외면 받더라도 별도의 터전(민속박물관, 민속마을, 각종 전시장 등)을 마련하여 맥이 이어지도록 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 같은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그런 기능을 보유한 기능인의 보호와 육성이 또한 필수적이다. 현재는 가끔 새끼나 이엉이 필요해도 엮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애를 먹는 현실이다. 아마도 얼마 못가서 그나마 명맥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제라도 그 명맥이 끊어지기 전에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기능보유자’들을 발굴하여 젊은 세대에 전수가 될 수 있도록 각별한 대책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

*짚이 갖는 자연 친화성*
짚이 조상들의 생활 속에서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몫은 초가지붕일 것이다.
지금은 몇 군데 민속마을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없어져버린 초가지붕은 내구성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기와지붕에 뒤질지 몰라도 방수성이나 쾌적성은 한결 앞선다. 짚의 표면은 수분이 침투하기 어려운 각피(角皮)로 싸여 있으며, 이 각피는 油性이라 물이 묻으면 흡수되지 않고 흘러내린다. 겹쳐진 틈틈으로 통풍도 잘되게 되어 있다.
초가집의 흙벽은 얇지만 잘게 썬 짚나라미를 섞어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왜냐하면 짚은 밖에서 들어오는 찬 공기, 뜨거운 공기를 적당히 조절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볏짚이 공예품 원료로 쓰일 때 먼저 짚추리기를 한다. 짚추리기는 수냉이쪽(벼 위쪽)을 움켜쥐고 다섯 손가락으로 빗질을 하듯 훑어내려 총대를 벗기는 것을 말한다. 볏짚은 밑동인 짚똥구녕, 벼이삭이 나온 가운데 줄기인 매답, 이삭이 달렸던 줄기인 새꽤기, 겉껍질인 총대 등의 부분명칭이 있다. 이렇게 짚을 추린 다음 새끼를 꼬고 다른 공예품도 만든다.
새끼는 모든 짚공예품의 기본이다. 새끼에는 오른새끼와 왼새끼가 있다. 오른새끼는 오른손을 밑으로(바깥쪽) 내리며 꼬는 새끼이고 왼새끼는 왼손을 밑으로 내리며 꼬는 새끼이다. 왼새끼는 악귀를 쫓는 힘이 있어 금줄을 치는 곳에 썼고 보통은 오른새끼를 썼다. 금줄은 부정한 것의 접근이나 침범을 막기 위해 문이나 길 또는 신성한 것에 두르는 새끼이다. 아이를 낳은 집이나 동제 때는 금줄을 쳤다. 무당이 강신제를 할 때 쓰는 신구들도 새끼줄이 많이 쓰인다. 장독 언저리에도 새끼를 둘러 장맛을 지켰다.
새끼는 매우 철학적이다. 우선 낱낱의 볏짚은 매우 약하지만 여러 개가 모여 꼬아지면 매우 힘이 있는 끈이 된다. 두레를 하는 이치와 같다. 짚은 새끼로 꼬이고 새끼와 짚이 어우러져 그 많은 짚공예품이 만들어진다. 새끼는 짚공예품의 기초골격인 것이다.

*솜씨 좋은 조상들, 뭐든지 다 만들어 썼다.*
우리 겨레는 자연과 어우러지면서 자연을 이용하였다. 짚외에도 깔따리, 싸리, 버들가지, 댕댕이덩굴, 개나리, 겨릅대, 인동덩굴 등 다양한 풀을 이용하여 채반 동고리 바구니 등 숱한 용구들을 만들었다. 뺑대쑥으로 발을 만들었고 왕골, 잘포, 줄, 띠로 여러 가지 자리를 만들었다. 갈대로는 삿자리, 노화비, 화승을 만들었고 비사리로는 각종 무늬를 곱게 새겼다.
칡멀개덤불이나 솔새뿌리로는 솥솔을 만들었고 댑싸리 수수싸리로는 빗짜루를 만들었다. 부들이나 띠로는 도롱이와 자리를 만들었다. 억새로는 지붕을 이었고 청올치로는 갈포를 짰고 짚신을 삼았다. 산과 들에 나는 섬유질이 있는 어떤 풀로도 만지작거리면 훌륭한 그릇과 도구들을 만들었다. 우리 겨레에게 풀은 식량이고 약이고 퇴비이고 반찬이고 공예재료였다.
산과 들의 풀과 짚, 그것들을 이용한 풀 같고 지푸라기 같던 백성들, 그들이 만들어 냈던 소박하고 정갈하고 맵시 좋은 공예품들, 이들은 지금 쏜살같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현옛것은 비능률, 불합리, 비위생, 비생산이란 굴레를 씌워 모두 없애려고 한다. 우리의 것을 갈고 닦고 빛내고 전승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제 농촌에서조차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 숨결. 수천 년 이어온 그 작은 민속 공예품 하나를 널리 세계에 알리기는커녕 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죽여 버리는 정책과 발전이 과연 나라에게 가치 있는 일인가 되새겨야 할 때이다.
우리의 짚문화, 풀문화 나아가 농촌문화를 우리가 되살려야 한다. 도시의 많은 노령인구를 활용하여 우리의 산과 들에 나는 짚과 풀을 이용한 공예품을 개발하여 많이 애용하고, 널리 세계에 알리고 관광 상품화하여 후손과 세계에 그 손재주와 미적 아름다움을 남기는 일은 아주 손쉽고 시급하고 훌륭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몇 가지 짚공예품에 대한 소고*
짚은 우리 조상들과 아주 가까웠다. 지푸라기 같은 백성들은 짚으로 농사에 쓰이는 여러 가지의 농구나 살림살이를 손수 만들어 썼다.
짚으로 만드는 것 중 제일 크고 신기한 것은 멍석이었다. 멍석은 아무 곳에나 펴기만 하면 앉고 뛰고 눕고 놀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멍석을 깔고 차일을 치면 초례상도 차리고 굿판도 벌이고 잔칫상도 펼쳤다. 멍석은 부숭부숭하여 곡식을 말리는 데는 그만이었다. 흙.
집집마다 몇 닢씩 마련하였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멍석에 말아 때리는 멍석말이도 했다.
짚신은 짚을 이용한 공예품 중 가장 정교한 것이다. 조상들은 짚신을 만드는데 온갖 정성을 들여 최고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

맷방석은 동그랗고 언저리가 다소 높아 가운데 맷돌을 안치는 멍석이었다. 둥구미는 멱둥구미로서 둥글고 언저리가 높고 곡식을 담는 용도이다. 멱서리는 벼 한 섬이 들어가도록 만든 커다란 용구였다. 종자를 보관하는 종다래끼는 작지만 꼼꼼하고 질기게 만들었고 씨뿌리는 종다래끼는 허리에 차게 끈이 달렸다.
섬은 커다란 가마니로 가마니보다 용량이 크고 거칠었다. 가마니는 일제시대부터 만들었고 열말들이 이다. 가는 새끼로 날을 심고 짚을 씨로 넣어 짰다. 씨오쟁이는 섬 모양으로 아주 작게 만든 씨앗보관용 용구였다. 망태는 새끼로 떴고 연장을 넣어두거나 땔나무를 나르거나 물건을 담는 그릇이었다.
주저리나 벌 멍덕은 짚으로 대충 엮어 만든 벌통 뚜껑이었고 두투레 방석은 짚으로 둥글게 돌아가며 엮은 것으로 땅에 묻는 김칫독의 뚜겅으로 쓰였다. 깔방석은 부엌일을 할 때 깔고 앉는 용도였다. 또아리는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머리를 보호하고 바닥을 판판하게 하기 위한 용도였다. 삼태기는 재나 두엄을 짧은 거리를 나를 때 쓰는 물건이었다. 또 짚으로는 비가 올 때 우의처럼 둘러쓰는 도롱이를 만들었다. 이밖에도 닭이 들어가 알을 낳거나 품는 닭둥우리, 낫을 꽂는 낫꽂이, 마소 등에 얹는 덤치, 비바람을 막아주는 떠날래, 가장 거칠고 성기게 짠 거적, 지게에 얹어 물건을 나르는 바소쿠리, 초가지붕의 용마름 이엉 등 숱하게 많은 생활용품과 농기구가 농부의 손을 거쳐 탄생되고 닳아져 갔다.
짚으로 만드는 이런 물건들은 수명이 짧았다. 짚신 같은 것은 이삼 일, 어떤 것은 서너 달, 기껏 길어야 몇 년이면 수명이 다했다. 그래도 농민들은 정성을 다하고 재주를 부려 아름다움과 실용적인 것들을 만들어 냈다. 농사일이 끝나면 호롱불을 켜 놓고 여럿이 둘러앉아 어깨너머로 배우고 익혔다. 그랬기에 농사꾼이면 누구나 멍석, 짚신, 둥구미 등을 못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또 이런 물건들은 내다 파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자신의 집안일이나 농사일에 필요하여 자신이 직접 만들어 쓰는 것이어서 ‘장이’가 별도로 없었고 만든 사람의 이름이 전해지지도 않았다.
기술에 얽매이지도 형식에 구애를 받지도 않는 이런 짚공예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우리 조상의 슬기와 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중한 유물인 것이다. 몇 십 년 후면 이런 짚공예도 전수가 끊기고 골동품이 되다가 문화재가 될 슬픈 영광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이 같은 짚공예품을 만드는 명맥이 끊기기 전에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006.2.18. 보은신문 기고>
서장원(60세,前농협청주교육원장, 회북면 건천리 출생)
02-557-5480, 017-223-5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