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읍 종곡리 마을탐방

36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 종곡리(안북실)

2006-01-27     보은신문
설날 특집호를 쓰기 위해 찾아간 곳은 경주 김씨 집성촌인 보은읍 종곡리다.

안북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서낭나무를 비롯해 단오날 그네를 뛰던 달안이 느티나무,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는 회관 앞 느티나무 등 수령이 몇 백년이나 된 나무들의 모습을 보면 세월의 무게에 숙연함이 느껴진다.

아름드리 고목(古木)이 지켜주는 안북실의 마을 풍경은 설날을 앞두고 고향을 찾을 생각에 마음이 설레고 기대될 만큼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은읍에서 속리산 쪽으로 한3㎞쯤 가다보면 삼년산성을 지나 왼쪽으로 산에 빙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전혀 마을이 보이지 않는 아늑하고 양지바른 종곡리(안북실)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마을 가운데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생김이 꼭 종같이 생겼다해서 산 이름을 종산(鍾山)이라 하고, 여기서 종(鍾) 자를 쇠북 종자로 쓰기 때문에 북산이라고도 부르며 마을 이름의 유래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종산에 얽힌 이야기로는 옛날에 사람들이 과거를 보러 가는데 그때 산에서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면 이 마을에 세거하는 경주 김씨 문중에서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왔다는 것이다.

종같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북소리가 나는 산이라 종산, 북산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북실 또는 종곡이라 했다.

종곡리는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다라니(월안말)는 마을명의 유래가 되는 종산이 있는 곳으로 마을 앞산이 달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동편말(종동말), 삼성동(종서말), 모정골(종남동)이 종산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한다.

예부터 종곡리 일대를 12북실이라 했는데 종곡리 4개 마을(다라니, 동편말, 삼성동, 모정골)을 포함한 강신리(강신, 안양, 새말, 외뿔), 누청리(누저, 강칭이), 성족리(소라리, 뱅이) 마을을 그렇게 부른 것으로 전해진다. 안북실인 종곡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깥북실로 불린다.

83호 175명의 주민들이 살아가는 종곡리는 김교호(46) 이장, 김홍권(69) 노인회장, 김홍돌(42) 새마을지도자, 최옥순(38) 부녀회장 이 마을의 번영과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항상 애쓰고 있다.

# 모현암 등 다양한 문화유적 볼 수 있어
종곡리 인근에는 대곡 선생과 관련된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모현암’이다. 종곡리 3번지, 대곡에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의 T자형 목조 기와집이다.

을사사화(1545년) 때 성운의 형 성우가 억울하게 죽자 성운은 처향(妻鄕)인 종곡리로 낙향하여 건물을 지어 사암(砂巖)이라 하고 젊은이들을 가르쳤으며, 이곳 지명을 따라 호로 삼았다.

대곡 성운이 북실로 낙향하였다는 소문이 나자 서화담, 터정 이지함, 남명 조식 등이 찾아와 학문을 교류하는 등 당대 유명한 석학들이 종곡리로 모여들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동고 이준경은 ‘별은 종곡에 떨어졌다’고 한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조선 중기 산림학파의 거두인 대곡 성운 사후 1884년(고종21)에 입재 송근수가 ‘모현암’이라 현판하였다. 현재 대곡 선생의 비석은 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지만 당시 학계의 거장들이 모여 학문의 가교역할을 한 모현암은 비지정 문화재이다. 그래도 종곡리 주민들에게 모현암은 큰 자긍심으로 자리매김돼 있다.

그런가 하면 고령 신씨 의열문도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고령 신씨는 대사헌 졸제 신식(拙濟申湜)의 딸로 경주인 참판 김덕민의 부인이다. 정유재란 때 피난 도중 왜적에게 봉변을 당하자 소지하고 있던 칼로 적을 찌른 후 왜병이 만진 자기 유방을 잘라 땅에 던지고 스스로 자결하였다.  1598년 선조31년에 적을 죽였으니 충효(忠義)요, 남편에 대한 정절(貞節)을 지켰으니 열(烈)이라 하여 선조가 친히‘의열(義烈)’이라 명정하였다.

이밖에도 종곡리에 보존되어 있는 다양한 문화유적은 시대를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경주 김씨 집성촌
고려 말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판도판서를 지낸 김장유가 어수선한 정국에서 벼슬을 버리고 현재의 탄부면 평각리에 은거하다가 후에 종곡리로 터전을 옮겼다. 그 이전에 종곡리에 마을이 형성돼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며, 반씨가 살았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종곡리 경주 김씨는 판도판서공파 중 김제공 파와 전한공 파가 대부분이며 몇 가구를 뺀 마을 전체가 경주 김씨 일가이다.

명절 때면 15촌 이내가 제사를 함께 지내는데 큰집부터 작은집 순으로 하루에 보통 15집 정도 다니면서 제사를 지냈다. 그때는 한 번 모이면 몇 십 명이 넘으니 방에 못 들어가는 사람은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서 절을 했을 정도다. 지금은 함께 방 안 제사를 지냈던 가까운 집안이 많이 외지로 떠나고 역귀성도 늘고 있는 추세라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5∼6집 정도는 아직도 모여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은 옷차림도 평소와는 달리 갓이나 유건을 쓰고 제사에 참석한다.

김교호 이장의 말로는 주조(酒造)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시절에는 몰래 술을 담가 제사상에 올렸는데 밀주(密酒) 단속이 나오면 이웃 간에 정보를 알려줘 단속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경주 김씨 할아버지 시제를 지낼 때는 전국에서 350∼400여명이 종곡리로 모인다고 한다.

# 특색 있는 마을로 화제
종곡리는 지난 18일 KBS ‘6시 내고향’에 소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 성씨의 집성촌이라는 현재에 보기 드문 마을의 특색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끈끈한 단합력이 잊혀져가는 전통과 세대간, 이웃간 단절된 인간 관계 회복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에는 ‘TV쇼 진품명품’(KBS)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경주 김씨 일가의 유물이 방송됐었다고 한다.
그 당시 방송된 600년 전에 기록된 경주 김씨 최초의 목판 족보 외에도 도자기, 고서, 삼국지 등 가치 있는 물건들이 현재까지 전해지나 보관 상태가 양호하지 못해 손실의 우려가 있다며 주민들이 걱정스런 얼굴을 내비쳤다.
보은군에 마련된 ‘향토사박물관’에 위탁 보관하는 것도 한번쯤 고려해 볼만한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충청북도 전통마을 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종곡 마을의 역사와 문화, 주민들의 삶을 다룬 책‘보은 종곡마을’이 출판되었다.
종곡리는 마을의 특색이 뚜렷하다. 그것을 오래도록 잘 지키고 가꿔나가는 건 주민들의 몫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이 따른다.
종곡리에는 기와집이 아직도 남아 있어 보는 이들에게 옛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옛것이 점점 사라져 가는 요즘 행정적인 뒷받침이 없다면 그것을 보존하기란 무척 어렵다.
집이 오래되다 보니 집 형태가 뒤틀리고 가와가 낡아 현대식으로 집을 새로 짓거나 지붕만 양철로 바꾼 집들이 많이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새로 기와를 올리고 수리를 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저렴하다고 한다.
종곡리를 찾는 외부인들은 마을에 대해 호평을 아끼지 않는다. 마을이 너무 예쁘다며 이런 곳에 와서 살고 싶다고 집 좀 알아봐 달라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종곡리에는 학림을 지나 창리로 향하는 관문인 곱냉이고개가 있다. 조선시대 과거를 보는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지났던 길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있다 보니 산길을 주로 이용했으며 아직도 그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종곡리 주민들에게는 한 가지 큰 걱정이 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부자가 되는 것 같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구 마을회관 자리가 마을 소유의 땅이라고 철석같이 믿어왔는데 그것이 국유지라는 것이다. 몇 백년 동안 마을 땅으로 알고 살아왔으며 주민들에게는 마을의 역사와 자신들의 삶이 베어있는 소중한 장소다. 지금의 노인정을 그 자리에 지으려고 했으나 허가를 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문중 땅을 빌려 노인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시골에 있는 마을회관(노인정)은 대부분 땅과 건물이 마을 공동 소유의 재산으로 그것이 주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런데 남의 땅에 마을 건물을 지었으니 주민들 마음이 불편한 건 당연한 것이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주민들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다.  국가에서 불하를 하면 마을에서 살 의향이 있다지만 그것도 쉬운 것만은 아닌 듯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 있다. 땅도 마찬가지다. 콩을 심어서 잘 되는 밭이 있는가 하면 과일 재배가 유독 잘 되는 밭도 있다.
종곡리 구 마을회관 자리는 주민들이 느티나무 아래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꽃도 피우고 마을일도 함께 하는 주민들의 단합된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다.
‘할 수 없다’는 답변보다는 될 수 있게끔 해주는 긍정적인 행정처리가 하루빨리 이루어져 좋은 해결책이 제시됐으면 한다.
설날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고향을 찾는 후손들에게 까치가 물어다주는 새해선물은 평화롭고 인정이 넘치는 종곡리 마을 그 자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