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면 기대리-자연 경관이 수려한 청풍명월의 고장
2005-12-16 김춘미
마을을 처음 마주한 그때의 느낌은 ‘인상이 참 좋다’였다. 훤칠한 자태를 드러내는 운무봉의 높다란 자락 밑,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마을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포근해 보였다.
마을 앞을 지나는 냇가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쉼터, 휴식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2000년 새로 건립한 마을 회관은 1층은 부녀회구판장으로 2층은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앞의 마을자랑비는 500년 이상된 마을의 역사를 한아름 담고 마을을 지켜주기라도 하듯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늠름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때는 160여호나 될 정도로 무척 번창한 시절도 있었지만 여느 시골 마을과 같이 이농현상으로 규모가 작아졌다. 그래도 기대리는 군내에서 읍소재지나 면소재지를 제외한 단일 마을로는 큰 마을에 속한다.
마을 모양이 키와 같이 생겼다하여 깃대 또는 짓대, 기대라 하였는데, 산수가 빼어나게 좋아 선비들이 많이 은거하였고 소나무 숲이 우거졌으며, 대추나무도 많아 대추골을 이루기도 했었다.
기대리는 이장 정운섭씨(59)와 노인회장 이영수씨(73), 부녀회장 도순자씨(55), 새마을 지도자 이윤창씨(39)가 마을일을 내일처럼 여기며 항상 최선을 다해 마을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다. 매서운 겨울 바람 앞에 따사로운 햇살이 고개를 못 들만큼 몹시 춥던 날 취재를 위해 기대리로 향했다.
마을을 처음 마주한 그때의 느낌은 ‘인상이 참 좋다’였다. 훤칠한 자태를 드러내는 운무봉의 높다란 자락 밑,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마을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포근해 보였다.
마을 앞을 지나는 냇가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쉼터, 휴식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2000년 새로 건립한 마을 회관은 1층은 부녀회구판장으로 2층은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앞의 마을자랑비는 500년 이상된 마을의 역사를 한아름 담고 마을을 지켜주기라도 하듯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늠름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때는 160여호나 될 정도로 무척 번창한 시절도 있었지만 여느 시골 마을과 같이 이농현상으로 규모가 작아졌다. 그래도 기대리는 군내에서 읍소재지나 면소재지를 제외한 단일 마을로는 큰 마을에 속한다.
마을 모양이 키와 같이 생겼다하여 깃대 또는 짓대, 기대라 하였는데, 산수가 빼어나게 좋아 선비들이 많이 은거하였고 소나무 숲이 우거졌으며, 대추나무도 많아 대추골을 이루기도 했었다.
# 箕山(기산)과 潁水(영수)에 대해
기산명월 영수청풍(箕山明月 潁水淸風)이란 삼태기같이 생긴 기이한 산에 밝은 달빛이 가득하고, 중국에서도 빼어난 영수에 맑은 바람이 가득하다는 뜻으로 이런 청풍명월에 젖어 선비들이 각처에서 모이고 모여 은거하던 곳이 바로 기대였다고 한다.
箕山과 潁水는 중국 하남성에 있는 아름다운 산과 물의 이름이며, 천하의 달사(達士)로서 고결한 인품을 지닌 허유(許由)와 소부(巢父)가 이웃을 하고 살던 곳인 바, 요(堯) 임금이 황제 자리를 허유에게 이양(移讓)하려고 찾아와 권하였으나, 허유가 그곳에서 밭 갈고 수양(修養)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것이 강풍산월(江風山月)을 벗하는 선비의 지조(志操)라고 사양을 한 후, 요 임금이 간 다음 그 소리를 들은 것이 꺼림칙하여 영수(潁水)의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더니, 그곳에 물을 먹이려고 소를 몰고 오던 소부가 그 연유(緣由)를 듣고 이 물은 소에게 먹일 수 없다하고 도로 끌고 갔다. 소부도 역시 요임금에게 황제 자리를 권유 받았으나 굳게 사양하고 은둔하므로 기산을 운무산(雲霧山)이라 했다. 바로 이러한 중국의 기산 영수에 버금가는 기대리의 뒷산을 기산에 비유하여 운무봉(雲霧奉)이라 하고, 앞물인 보청천은 영수와 똑같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그로 인해 기대리가 충청도의 청풍명월을 대표하는 고장으로 고결한 천하(天下)의 달사(達士)가 배출될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 과거는 묻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기대리는 전체 96세대 약 200여명의 주민이 생활한다.
이 중 청주 이씨가 30호, 동래 정씨가 30호로 양대 산맥을 이루며 그 외에 타성이 각각 분포되어 있다. 고려 말엽 기대리로 들어온 청주 이씨는 30대를 넘게 살고 있으며 청주 이씨 사당까지 건립해 조상을 모신다. 임진왜란 때 들어온 동래 정씨도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온다. 예전에는 두 성씨가 서로 견제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마을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 스스로 손을 내밀어 협력하는 주민 일심동체를 실현하고 있다.
이들은 6년 전 관광버스 2대를 대절 100명 정도가 참여한 화합을 다지는 첫 사업인 '단체 관광'을 출발점으로 젊은이들이 청년회를 구성해 단합대회를 개최하는 등 이제는 한 마을 한 주민이 되어 살아간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기대리는 어느덧 단합이 잘 되는 모범 마을이 되었다. 정운섭 이장이 앞장서 1년에 총 8차례 분기별로 마을 대청소를 하는데 주민들이 나서서 적극 협조한다고 한다. 영세민과 임원들은 군에서 지원 받는 쓰레기봉투를 마을에 기증하고, 노인들은 청소뿐 아니라 쓰레기를 수거해 재활용품을 분리하는 일까지 도맡아해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집집마다 빈 병이나, 플라스틱 등 각종 재활용 쓰레기는 잘 모아뒀다가 마을 대청소하는 날 처리하기 때문에 자칫 환경오염을 불러올 수 있는 것들이 주민의 노력으로 유익하게 쓰여진다.
피서철에는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로 하천 주변이 많이 더렵혀진다고 한다. 이를 막기 위해 정운섭 이장과 마을 주민들이 피서객을 상대로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지 않을 것을 당부하는 등 자연보호에 발벗고 나선다. 그 덕분에 예전보다 쓰레기의 양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단 한 개의 쓰레기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성숙된 시민 의식이 자리잡지 않는 한 기대리 주민들의 수고는 계속될 것이다.
# 양수장 생기면서 부농의 꿈 일궈
‘달밤에 가뭄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대리의 농지는 모래, 자갈이 많아 농사 환경이 척박했다. 벼농사를 짓기가 어려웠기에 밭농사가 대부분이었으며, 쌀밥은커녕 보리밥조차 먹을 수 없어 감자,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던 가난한 시절이 있었다. 이런 척박한 땅을 농지 정리 하고 양수장을 만들어 냇물을 퍼 올려 농업용수로 활용하면서 밭을 논으로 변경 벼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때부터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쌀밥을 먹고 부농의 꿈을 일구기 시작했다.
마을을 번성하게 해준 것은 바로 ‘물’이었다.
마을 앞에는 삼가천과 적암천이 합류한 보청천이 흐르는데 수량이 많은데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여름철 피서객들의 발길을 모은다. 여름 한철이라지만 이들이 부녀회구판장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마을 운영에도 큰 도움이 된다.
기대리는 대추고을로 유명했었다. 마을은 물론 앞 하천 변에 둘레가 제법 큰 몇 십 년씩 된 대추나무가 줄을 이었고 수 ㎞에 걸쳐 그 모습이 대단했었다고 한다. 인근 상주 지방에서 대추를 주우러 왔을 정도라니 그 양이 짐작할만하다. 그러나 80년대 닥친 물난리로 대부분을 잃고 그 후 서서히 자취를 감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70년대 마을 내에서는 땅을 사고 팔지 못하게 하고 등 주민 모두가 잘 살기 위한 노력을 벌여 오늘의 기대리를 만들었으며 구암, 소여, 세중골 등 인근 지역에 기대리 농민 소유 농토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주변경치가 빼어나 보존할 만한 가치 높아
기대리에는 하천변에 수령이 4, 5백년된 느티나무가 4그루나 있다.
큰 골에 나무를 심어 마을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4그루 중 1그루는 죽고 1그루는 고사직전이다. 몇 백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서서 마을의 안녕을 수호해주고 주민들의 휴식공간과 아이들의 놀이터가 돼주었다. 정운섭 이장은 느티나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지금 병들어 있는 1그루의 상태가 제일 큰 걱정이라고 했다.
주민들에게 아낌없이 준 것은 나무뿐만이 아니었다. 냇가에는 메기며 쏘가리, 새우 등 민물고기가 아주 많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걸 잡아다가 매운탕도 끓여먹고 불에 구워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삶의 한 부분이었던 생활 터전에 추억만이 남았다.
15년 전 탄부면 고승에 분뇨 처리장이 생기고 나서부터 주민들은 냇물을 먹지 않았다. 수질오염의 원인을 그것으로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웬일인지 하천은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오염돼 갔다. 그 후로 피서객들의 행렬이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기대리에는 활장터라 불리는 곳이 있다. 아니 ‘있었다’란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앞산 아래 하천 변에 있는 백사장으로 옛날에 이곳에서 활을 쐈다하여 활장터라 한다. 이곳은 마을 어른이나 청년 또는 아이들이 씨름을 하며 놀이도 즐기고 서로 우애도 다졌던 정겨운 장소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98년 수해로 인해 모래가 다 쓸려나가 이젠 과거의 기억 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그 당시 거의 전멸되었던 다슬기는 다행히 2, 3년 전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옛날의 풍성함을 다시 되찾았다.
기대리는 주변 환경도 좋고 주민수도 많아 나름의 특색을 살려 아름다운 경관을 보존하고 가꾼다면 남부럽지 않은 관광지가 조성될 가능성이 충분한 마을이다.
# 주민이 합심하여 체계적인 마을 운영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 없어진 줄 알았던 구판장이 기대리에서는 아직도 제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구판장은 부녀회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회원들끼리 순서를 정해놓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일정 기간 가게를 맡고, 달마다 많이 팔건 적게 팔건 정해진 금액을 내놓는 식으로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마을과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별로 기금이 안정적으로 마련돼 있는 것은 주민들이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이며, 정운섭 이장의 말대로 객지에 나가 있는 자손들의 고향 사랑이 애틋해 적지 않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대리의 생활용수는 설거지를 하고 나면 손이 거칠고 틀만큼 억세다. 반면 냇물은 깨끗하던 시절 쌀도 씻고 야채도 씻어다 먹을 정도로 순하다고 한다.
마을 식수는 1년에 한 번 하는 수질 검사에서 합격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예전에 관정을 할 때 물에서 석탄이 나온 적도 있고, 식수로서는 물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며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관정을 다시 하거나 냇물을 올려 정화해서 먹는 것이 지금보다는 더 좋다는 의견이었다. 기대리와 그 일대에 동광, 탄광, 형석광 등 광산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물이 안 좋다는 의견에 수긍이 갔다.
또 하나의 숙원사업으로는 마을 앞쪽 하천에 둑을 쌓는 일과 그 위로 외곽도로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름철 장마 시 하천 방향으로 농경지가 침수되는 피해를 줄일 수 있고, 마을 앞을 지나는 차량의 우회로 교통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등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 마을의 입장이다.
한두 가지 불편한 점이야 늘 있어왔으니 그러려니 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젠 농민들도 호사(豪奢)까진 아니어도 마음놓고 편안히 살 수 있는 환경이 사회적으로 잘 뒷받침되길 바란다.
김춘미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