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철위(十哲位)를 매안하고(2)

2005-11-25     보은신문
1. 문묘의 설치
문묘는 공부자를 받드는 묘우로 문선왕묘 또는 공자묘라고도 한다. 신라 성덕왕 16년(717) 9월 김수충이 당나라에서 문선왕을 비롯하여 10철과 72제자의 도상을 모시고 와 왕명에 따라 국학에 안치한 것이 우리나라 문묘제도의 시초인 것이다.

문선왕이란 당나라 기원년(713)에 공자에게 내린 시호이며 72제자는 공자의 3천제자 중 육예를 통한 훌륭한 유현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에서는 국초부터 문선왕묘를 국자감에 같이 세웠다고 하였으니 성종 11년(992)에 국자감이 창립되었으니 이때 처음으로 문묘의 제도를 시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묘의 제도는 공자를 모시는 본전을 대성전이라 하고 그 앞에 동서로 설치한 전우를 무라 하고 이곳에 공자의 제자와 기타 유학 진흥에 공이 있는 중국의 유현을 모시고 있는데 이를 종사라 한다. 그리고 따로 강학하는 곳을 세워서 이를 명륜당이라 하고 그 부근에 학생들의 기숙사를 마련하여 이를 재라고 하였다.

그 후 28년이 지난 현종 11년(1020) 8월에 신라 말의 학자 최치원에게 내사령을 추증하고 동왕 13년 5월에는 설총에게 홍유후를 추증하고 각각 분묘에 종사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유학자를 문묘에 종사한 시초이다.

조선시대에 와서 다시 10명을 종사하였으나 모두 양무에 모시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 설총의 두 분은 대성전 내에 종사하였는데 이는 유학을 진작시키고 선유를 존숭하려고 하였던 현종의 큰 뜻이라 하겠다.

2. 조선의 문묘
조선시대에도 공자를 정위로 하고 중국과 고려의 선현을 향사하였는데 태조 때 중국의 제도에 따르기로 하였으며 점차로 위차가 정돈된 것이다.

태조 7년(1398)에 종래 화상으로 된 것을 위패로 고치고 태종 7년(1407)에 공자를 정위로 하고 안자, 증장, 자사자, 맹자 등 4성을 배향하고 공문십철을 동서에 각 5위씩 종사하고 고려 현종때 종사된 최치원, 설총과 충숙왕 6년(1338)에 종사한 안향을 대성전에서 양무로 옮겨 중국의 유현 뒤에 봉안하였다.

그 후 숙종 40년(1714)에 양무에 봉안하고 있던 송나라의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를 대성전에 종사하였는데 이 분들을 송조육현이라 한다.

우리나라 유현은 중종 12년(1517)에 문충공 정몽주를 무에 모신 것을 필두로 광해 2년(1610)에 문경공 김굉필, 문헌공 정여창, 문정공 조광조, 문원공 이언적, 문순공 이황을, 숙종 43년(1717)에 문원공 김장생을, 영조 32년(1756)에 문정공 송시열, 문정공 송준길을, 영조40년(1764)에 문순공 박세채를, 정조 20년(1796)에 문정공 김인후를, 고종 20년(1883)에 문열공 조헌, 문경공 김집을 무에 종사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유현이 모두 18명으로 이를 동국 18현이라 부르고 있다.

따라서 조선조 말 성균관 문묘에는 대성 전에 오성과 십철 그리고 송조육현등 21위를 봉안하고 동서 양무에 각기 공자의 제자 65인을 포함 한, 당, 송등 중국의 역대 유현 94인과 동국 18현을 봉안하여 모두 133위를 봉안하였고 별도로 계성사라는 사우를 설치하여 오성의 부위를 봉안하였다.

3. 지방 향교의 봉안위
지방향교의 문묘에 봉안하는 위패수도 성균관 문묘와 같이 133위가 원칙이다. 그러나 각 고을의 크고 작은 것을 감안하여 봉안 위패를 조절하였는데 계수관은 성균관 문묘에 따르도록 하였는데 이를 대설위라고 하였으며 주, 목, 군은 5성과 10철, 송조6현 그리고 동국 18현 등 39위를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중설위라 하고 현에는 5성과 송조6현 그리고 동국 18현 등 29위를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소설위라 하였다.
소설위 향교라 하여 위패수가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송조6현 중 소옹과 장재를 제외한 4현만 봉안한 향교가 있는가 하면 3현 또는 정호와 주희의 2현만 봉안한 향교도 있다.

4. 성균관 문묘의 변천
1945년 광복 후 유교사회의 개혁에 힘을 쏟던 심산 김창숙선생은 유도회 총본부위원장에 취임하자 유림의 재조직과 민족주의 사상고취에 역점을 두어 1949년 전국유림대회를 개최하여 5 성위와 송조 2현(정호, 주희)을 제외한 공문 10철위와 동, 서 양무에 중국인 유현 94위를 매안하고 양무에 봉안하고 있던 우리나라 18현을 대성 전에 승봉하기로 결의하고 전국 향교에도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안에 대하여 지방의 특히 간재 전우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 유림들의 반발로 일제히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 후 1961년 2월 23일 개최된 전국유림대회에서 매안 한 공문 10철과 송조 4현은 복위하기로 결의하여 현재 성균관 대성전에는 5성과 10철 그리고 송조 6현, 우리나라 18현 등 모두 39위를 봉안하고 있다.

5. 보은향교 봉안위의 변천사
1941년 일제 소화 16년 당시 군수인 김학응이 작성한 보은향교배향록에 의하면 보은향교는 5성위와 공문 10철 그리고 송조 4현(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은 대성 전에 우리 날 18현은 동, 서무에 각기 9위씩 봉안한 것으로 기록 되여 있다.

그러나 향유인 송환조(1747∼1821)의 「임하유고」에 ‘본군교궁십철위승향’이란 시문으로 보아 보은향교는 소설위였다가 현감을 군수로 승차시킨 1806년(순조6)이후 예에 따라 10철을 봉안하여 중설위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광복후 1949년 성균관 지시에 따라 10철을 매안하였다가 1961년 다시 전국유림대회 결의로 10철을 복위하여 37위를 봉안하고 있었다.

6. 10철위 매안론 제기
광복후 당당한 독립국으로 사대주의로 중국인을 우리보다 높게 보던 잔재를 탈피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폭넓게 유림사회에 퍼져나가는 추세에 따라 보은 유림사회에도 향교 문묘에 중국인이 많다는 논의가 제기되게 되었고 유학은 5성에 의하여 확립되었고 분묘에 종사한 우리나라 18현의 학통을 살펴보아도 송유학의 계통을 밝은 성리학파에 속함으로 송조 4현은 계속 봉안할 필요가 있으나 10철은 비록 공부자의 제자들로 공부자의 말씀과 제자 및 그 당시의 인사 또는 상호간에 문답하였던 말씀을 모아 경서인 논어에 등장하는 인물로 유학 진흥에 특별한 공헌이 없고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경서가 거의 소멸되었다가 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삼아 다시 장려함으로 훈고학이 발달되었으며 당나라에 이르러서도 경학은 연구하고 학교를 일으키고 문묘를 세우는 등 유교진흥에 공헌한 한, 당시대의 유현도 10철에 버금가나 모두 무에 봉안하였다가 매안 되었음으로 10철도 매안 함이 옳다는 주장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김건식(보은향교 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