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노점생활’보은 장신2리 이원건씨
경운기에 가득 실은 신발 팔아 5남매 대학 졸업시킨 장한 어버이
2005-11-25 송진선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사는 얘기를 들어보면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인생이야기가 책 몇 권을 엮을 정도다. 그만큼 사는 것 자체가 모두 드라마인 셈이다.
보은읍 장신2리. 자연마을로는 비룡소라고 한다. 이 마을에 꽤 유명한 사람이 있다. 이름이 유명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한 편의 인생극장이 유명하고 인생극장에 올린 그 사람이 내민 인생 성적표가 매우 우수하다.
이원건(65)씨. 빈천하기 이를 데 없는 가난한 집안을 ‘노점생활’ 24년을 하면서 근검절약하며 논도 사고 슬하의 5남매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킨 부자가 된 것이다.
# 누가 고생을 사서한다고 했나
괴산이 고향인 이원건씨가 보은이 고향이 된 사연이 애처롭다. 일본으로 징용간 아버지 얼굴은 얼굴한 번 보지 못하고 내내 아버지를 기다리는 엄마와 단 둘이 살다가 6·25 전쟁이 터졌고 괴산보다는 더 남쪽이라고 피난 보따리를 싸서 남하한 곳이 보은이다.
그때가 10살. 그리고 이곳에 짐을 풀어 생활한 것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피난보따리에 싼 것이라고 해봤자 숟가락, 그릇 몇 개, 옷가지가 고작이었던 가난한 살림살이여서 날품을 파는 엄마와 함께 소년 이원건은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 돈을 벌어야 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하기 좋은 말이고 듣기 좋은 말이다. 중학교를 갈 나이에 남의 집 품팔이를 한 것을 두고 젊어서 한 고생이라며 후에 큰 재산으로 여길 것인가.
자신의 고생도 고생이었지만 엄마의 고생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다며 고생한 얘기만으로도 책 몇 권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도 없이 홀로 아들 하나를 잘 키워야 하는 엄마는 아들 이원건이 나중에라도 고생을 좀 덜하게 하려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쌀은 몇 개가 들어있나 셀 수 있을 정도의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 먹어 배를 불렸던 적도 있었다. 꽁보리밥이라도 간장에 김치 몇 쪼가리, 된장국이라도 있으면 그 날은 진수성찬이었다.
먹을 것 못 먹으면서도 돈을 모으는 재미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두 모자가 모은 돈은 비록 남들이 보기엔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초가삼간이었지만 두 모자에게는 임금이 사는 경복궁 부럽지 않은 16평의 내 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송아지도 샀다. 아주 부자가 된 청년 이원건씨는 어머니가 편안하게 이부자리를 펼 수 있는 집을 장만한 후 안심하고 군대를 갈 수 있었다.
# 81년부터 경운기로 청산 장까지
특별히 기술이 없었던 군 제대 후 이원건씨는 건설현장에 노무자로도 나갔고 대동정미소에서 방아도 찧었다.
그 사이에 25살 때 보은 중초리가 친정인 이무현(65)씨를 만나 결혼도 해 한 집안의 가장도 됐다.
젊어서 너무 고생을 해 성한 곳이 없을 정도인 어머니도 편히 모시고 가난한 나를 신랑으로 받아준 아내도 편히 지내게 하기 위해서는 벌이가 좀 커야 했다. 그래서 머리를 써서 사업을 구상했다. 사업이라고 해서 밑천이 많이 드는 것은 그들의 형편상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결국 동대문 시장에서 신발을 떼다가 시골 장을 다니며 파는 일은 경력이 없어도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어 1981년 신발 노점을 시작한 것이다.
밑천은 송아지 판돈이 전부였고 그의 동서가 이동할 때 쓰라고 경운기 한 대를 구입해줬다. 꺼먹 고무신, 흰 고무신, 운동화, 장화 등 동대문시장에서 구입해온 물건을 경운기에 가득 싣고 새벽 5시30분이면 청산 장이 서는 날이면 창산 장으로, 회인 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회인으로 떠났다. 보은 장날에는 보은 장으로 원남 장날에는 원남 장으로 떠났다.
딸딸딸딸… 속도도 나지 않는 경운기로 회인 장까지는 1시간, 청산 장까지는 2시간 걸려 도착하면 겨울에는 손발이 꽁꽁 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여름에는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지만 그는 노점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의 가족의 밥줄이었기 때문인 것은 당연했다. 또 고무신 한 켤레 팔아 크게 이문이 남는 것도 아니지만 고무신을 사가겠다고 가진 돈 탈탈 털어 맘먹고 장에 나온 시골 할머니들에게 실망을 줄 수가 없었고 같이 장에 노점을 펴는 시장 사람들 중 몸이 아팠는데 괜찮은지 궁금해 눈보라와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원건씨는 장날이면 어김없이 경운기에 몸을 실었다.
보은에서 청산까지, 회인까지 경운기로 운행을 하다니. 처음에야 밑천이 많이 드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지만 24년간 그의 발이 되는 것은 시내버스나 시외버스, 트럭이 아닌 경운기였다.
게다가 장거리 운행이어서 항상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그동안 교통사고도 3번이나 당했다.
자신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노점일을 하지 못해 이에대한 보상이라도 청구해야 하지만 천성이 선한 이원건씨는 다친 곳을 치료하기만 하면 됐지 무슨 보상이냐며 손사래를 치는 사람이다.
# 자식뒷바라지에 진 빚 작년에 다 갚아
옛날 그가 다닌 장은 보은 장과 회인 장, 청산 장, 원남 장이다.
이중 회인 장은 접었는데 하루 장 이용하면 주머니 속으로 들어오는 돈이 5만원, 지금의 10만원과 맞먹었지만 그 때 5만원이 훨씬 컸다고 한다. 그리고 보은 장과 청산 장은 규모가 커서 그래도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슬하의 5남매를 먹이고 가르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처음 결혼을 해서는 그의 부인도 혼자 고생하는 남편이 안쓰러워 벌어보겠다며 화장품 외판원 일을 했다.
무거운 화장품 가방을 메고 한 동네도 아니고 여러 동네를 다니다 보니 없던 병도 생길 정도로 1년 사이에 부인은 병을 달고 살았고 결국 호강은 시켜주지 못할망정 고생은 시켜주지 말아야 하는데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안쓰러웠던 이원건씨는 부인을 설득해 화장품 외판 일을 접게 했다.
그리고 보은장날만 같이 나와 판매를 하고 있는데 나머지는 오로지 남편이 벌어다 주는 푼돈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부인에게 자식을 먹이고 가르치는 일은 보통 막막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이 매일 서는 것도 아니고 한 달이면 18일 장에 나가고 하루 물건을 7, 8만원 어치 팔면 이중 이문이 25% 정도에 그쳐 이 정도의 수입으로는 자식들 대학교육은 커녕 입에 풀칠도 어려울 판이다.
그래서 장에 가지 않을 때는 남의 논도 갈아주고 밭도 갈아주고 농사도 남의 논까지 합해도 6000평을 짓는 등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야 했다.
옛날 못 입고 못 먹었던 때 정도는 아니지만 정말 그 때와 같은 마음으로 이들 부부는 안 먹고 안 사 입어 옷 한가지 번 듯 한 것이 없을 정도로 돈을 모아 자식들 뒷바라지에 다 쏟아 부었다.
2남3녀가 대학공부를 다 마치도록 농협에서 돈을 꿔서 학자금을 댔다. 첫째가 마흔, 둘째는 서른 여덟, 셋째 서른 다섯, 넷째 서른 셋, 막내가 서른인데 한 해에 1200만원이 들어간 적도 있을 정도로 자식 공부에 부부의 허리가 휘청했다.
그때 진 빚을 지난해에 겨우 다 갚아 이젠 좀 한 시름 놓고 있다고 한다. 대학공부 시켜놓으면 이젠 벌어서 아버지 좀 주려나 하지만 어디 그런가. 저 벌어 시집, 장가갈 밑천도 없어 혼수도 해주고 전세방이라도 얻어줘야 한다. 장사를 하겠다고 한 자식은 가게도 내줘야 한다. 계산하지 않고 깊이를 잴 수 없는 어버이의 무한한 사랑이 느껴졌다.
직장을 구하는 중인 막내아들만 결혼하면 24년간 경운기를 몰아왔지만 노점 일을 그만 두겠다는 이원건씨는 이렇게까지 가정을 잘 꾸려온 데는 그의 평생 반려자인 부인의 고생 때문이었다고 미안해했다.
책 몇 권 나올 것이라던 어머니의 고생담 못지 않게 그의 부인 고생담 또한 책으로 엮으면 나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이젠 가없는 부모사랑을 받은 자식들이 부모님 고생했다고, 그리고 감사하다며 회갑잔치에서 큰절을 올리고, 금반지와 금목걸이 걸어주며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고 하지만 보은 장, 청산 장, 회인 장을 다니며 신발을 팔아온 이원건씨의 인생성적표는 그래서 우수하다는 것이다.
까만 얼굴, 잠바에 모자를 푹 늘러 쓴 허름하지만 마음은 부자인 이원건씨를 시장에서 보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세상사는 사람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