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업소를 찾아서 3 - 제일 국수방앗간

36년 역사 살아있는 골동품 방앗간

2005-10-21     송진선
제일국수 방앗간을 대를 잇는 업소로 선정했을 때 보은에 남아있는 유일한 국수 집이라는 매력이 가장 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칼국수로 알고 있는 네모지게 써는 생국수와 동그란 모양으로 나오는 잔치국수라는 국수를 직접 했었다. 7월 달까지만 해도.

건조한 잔치국수를 샀던 적은 없었지만 뭉치당 500원하는 생국수를 다섯 뭉치 달라, 여섯 뭉치 달라고 주문하면 신문지에 둘둘 말아 준다.

미처 콩가루를 뿌려 국수를 밀 시간이 없는 엄마가 벼를 베거나 고추를 심거나 사람을 얻어서 할 일이 있을 때면 자주 심부름을 시켰었다.

처음에는 다른 곳에서 공급을 받아서 파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교사리 북부매표소를 지나가다 건물 2층에서 국수를 건조하는 것을 우연히 봤다.

그래서 국수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며 그러다 그 건물의 주인의 누구이다 등등 추적을 하게 되었고 아 이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취재원에 접근을 했다.

주인 어른의 면면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도 자주 그 방앗간을 이용했기 때문에 취재를 부탁하면 그렇게 거절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현재 방앗간을 물려받은 안광신(40)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국수를 이제는 만들지 않는다, 방앗간이 정리가 안돼 취재에 응할 수가 없다 등등의 이유를 들어 더 이상 고집을 피우며 취재를 하겠다고 할 수가 없어 일단 취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7월말 경이었다. 그리고 대를 잇는 업소 탐방기사를 취재하면서 다시 한 번 제일국수 방앗간을 공략(?)했고 결국 대를 잇는 업소 3호로 취재를 하게 되었다.
제일국수 방앗간을 취재하게 된 취재사(史)가 된 셈이다.

# 1969년 처음 방앗간 간판 내걸어
제일국수 방앗간의 시작은 방앗간을 물려받은 안광신(40)씨의 아버지 안병식(70)씨와 어머니 백란희(68)씨로 처음에는 방앗간이랄 수도 없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출발이었다.

마로면 소여리가 고향으로 그 때는 다 그랬듯이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꼭 쌀밥이 아니더라도 삼 시 삼 때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자식들 잘 먹이고 대학공부까지 가르쳐보자는 것이 방앗간을 시작한 동기였다.

아들 안광신씨가 4살 때이다. 아주 적은 양이어서 삯보다 전기세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어도 손님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한결같은 모습의 아버지를 봐왔다.

촌로들이 이고 온 들깨는 아주 꾹꾹 눌러 힘을 가해도 눌러지지 않을 정도가 될 때까지 기름 짜 다른 집보다 기름이 더 많이 나왔다며 좋아하는 소리를 들으며 방앗간 집 아들로 자랐다.

고추방아 잘 빻고, 기름 잘 짜고, 떡방아 잘 빻고 가래 떡 잘 빼고 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기술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아버지는 방아에 있어서는 명장, 고수였던 것이다.

정직하게 손님들을 대하고 그가 누구든지 성의껏 대하는 모습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방아 빻을 거리를 갖고 오는 사람을 줄을 이었다. 그렇게 제일국수 방앗간은 보은 시장 안에서 터를 잡을 수 있었다.

# 방아 돌려서 가난 털어내
아들 안광신씨가 물려받기 전 제일방앗간의 모습을 더듬어 본다.
항상 그곳을 지키고 있었던 아버지 안병식씨의 모습은 서리가 내린 하얀 머리(완전히 하얗지는 않았지만)에 하얀색 반소매 러닝셔츠 차림의 검소한 모습이었다.

3, 40년의 방앗간 역사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시골에도 없을 것 같은 펌프 물이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전기 코드만 꽂으면 기계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요즘의 기계가 아닌 피 대(皮帶 : 두 개의 기계 바퀴에 걸어 동력을 전달하는 띠 모양의 물건)로 연결시켜 방아를 찧는 기계가 버티고 서 있다.

요즘 수명과 조도면에서 인정을 받아 시골에서도 흔하게 사용하는 오시람 램프도 아니고 천장에서 줄을 밑으로 길게 내려 겨우 백열등을 달아 불을 켜 실내는 어두컴컴하다.

다이얼 돌리듯 하면 뚜껑 문이 열리는 금고 대신 방앗간 시작했을 때부터 썼던 검은 손 때묻은 돈 궤짝이 놓여 있고 고추방아를 찧을 때 쓰던 방망이, 방아찧은 것을 받았던 봉세기 등등 옛 것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눈 팔지 않고 외길 방앗간을 운영해서 지긋지긋한 가난도 이겨내고 이름으로 된 집도 사고 건물도 사고, 돈도 벌만큼 벌어 흔한 말로 자수성가했지만 티내지 않는 검소함만이 묻어있는 모습이었다.

# 대 이은 아들 36년 역사 고스란히 이어내
삼산초등학교와 보은중학교 보은고등학교 배재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아들 안광신씨가 방앗간을 물려받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4남2녀 중 3남인 안광신씨는 94년 대학 졸업 후 공부를 계속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연로하고 방앗간 일이 힘에 부쳐 일을 놓아야 될 상황인데 처분할 수도 없어 가업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는 꿈을 접었다.

방앗간 후계자가 된 것이다. 부모님의 피땀어린 가업을 잇는다는 숭고한 정신 전에 부모님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효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96년 결혼한 부인 신동선(36)씨도 부부는 일심동체라 더니 남편의 행동에 이의를 달지 않고 말없이 동의했다.

결혼하고 1년 간 아버지가 마련한 이평리 집에서 신혼생활을 보내고 2년 되던 해 부모님이 사시는 방앗간 2층으로 들어왔고 안광신씨가 부모님과 함께 직장인 1층 방앗간으로 출근하고 부인 신동선씨는 2층에서 1남2녀의 자녀를 키우며 살림을 했다. 2003년 10월 아예 아버지로부터 인수를 받기 전까지는 전업 주부였던 셈이다.

그러다 안광신씨가 후계자 수업을 받은 지 10년 만에 제일국수방앗간의 대를 이은 후에는 신동선씨도 전업주부에서 방앗간으로 출근을 했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방아찧는 기술이 아버지에 버금가고 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아들, 손자같이 정겹게 대하고 또 아버지 대부터 찾아오던 단골 손님들은 늘 제일 국수 방앗간을 찾는다.

올해 7월 안광신씨는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그동안 하지 못하고 미뤄왔던 페인트칠을 하고 기계를 새로 배치했다. 훨씬 방앗간이 훤해져 있었다. 저녁시간에 방문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 아버지가 운영했을 때보다 훨씬 환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배치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대신 고추씨를 빼고 가루까지 기계 하나로 모두 해결되는 기계를 새로 들여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돌렸던 기계들은 모두 고물로 내놓은 것아 아니라 아버지가 사용했던 그 기계들도 모두 그대로 놓았다. 옛것이라고 해서 모두 퇴물이 아니고 옛것은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기 때문.

자동이 편리하고 쉽고 공정이 빠르지만 모든 것이 자동이 다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옛날 아버지가 돌렸던 기계를 돌려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들기름을 자동유압식 기계로 짠다면 산초기름은 무거운 쇳덩어리를 누르는 재래식 유압기로 짠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춧가루 빻는 방망이, 저울, 제분기, 소면기 등등 제일국수 방앗간은 빻는 것과 관련된 골동품 진열장이다. 신구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 무엇을 하느냐 보다는…
손님 한 분을 못 받더라도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고추방아를 한 번 더 돌려 곱게 빻고 홍화씨를 곱게 빻는다.

이것이 안광신씨가 방앗간을 운영하는 나름의 소신이다. 예전에 비해 방앗간이 많이 줄었지만 이곳은 단골이 늘었다.

겸손한 처세와 허상을 쫓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는 부인 신동선씨의 붙임성 있는 행동도 단골이 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명절 때는 새벽 4시, 5시에도 일어나야 할 정도로 방앗간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방앗간을 찾는 할머니, 아주머니들과 대화를 하면서 삶의 지혜, 자식 키우는 것 등 내가 얻는 것이 더 많다며 오히려 방앗간을 하면서 인생을 공부한다고 표현했다.

생활하기 편리한 아파트에서 편하게 생활하고 아이들이나 키우고 옷에 밀가루 안 묻히고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요즘.

신동선씨는 이런 잣대에만 맞추다 보면 내 자신이 힘들어지고 남의 시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생활을 가꿔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물림 업소를 찾아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