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물림 업소를 찾아서 … 36년 역사의 보은 세탁소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일군 36년 가업 대학물 먹은 막내아들이 물려받아 4년 경력 쌓아

2005-10-07     송진선
대학 졸업은 안했지만 세탁소 하리라곤 생각도 안했죠


지금의 세탁소는 그야말로 일하기가 편하기 그지없지만 옛날에는 다리미를 연탄 화덕에 올려놓았다가 뜨거워지면 다리고 줄을 잘 세운다고 물이라도 뿌리면 녹이 슨 다리미 바닥에서 녹이 묻어나 흰옷을 다 버린다.

재봉틀도 일일이 발로 굴려서 바늘을 움직여 꿰맸어야 하고 세탁기가 없어 펌프 물을 퍼서 비누로 빠는 것이 세탁소이 기능이었다. 이것이 6, 70년대 세탁소의 모습이다.

경찰공무원이었던 박종환(74)씨가 세탁업에 손을 댄 것은 1969년11월경으로 당시 가난한 생활은 누구나 예외가 없었지만 아주 박한 공무원의 월급으로 살림살이가 버겁자 부인 김갑식(72)씨가 연탄 값이라도 벌어보겠다며 세탁소를 해보겠다고 한 것이 1대를 거쳐 2대인 막내아들에게 전수가 됐다.

당시 지금의 청미서림 옆에 있던 방 한 개가 달린 5평정도 되는 보은세탁소를 인수해 당시 세탁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기술자에게 방 한 칸을 제공해서 꾸려나갔다.

경찰이었던 박종환씨가 야근을 마치고 집에 와보면 출근해야 하는 기술자가 나오지 않아 집에 찾아가 보면 세탁 맡긴 옷을 갖고 도망가기 일수였고 경찰이었지만 자신의 집 도둑 잡겠다고 돌아다니지도 못해 계속 물어주기만 했다.

한 2년 운영하다 보니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져 가계 운영에 부담이 너무 컸다. 당시 경찰 월급이 1만9000원 정도에 불과해 봉급 타서 물어주기 급급했고 슬하의 다섯자녀 중 큰아들이 서울 국민 대학교로 진학을 했고 둘째 아들이 충남상고를 진학했고 셋째 딸이 청주 일신여고, 넷째 보은여상을 진학하는 등 지출 규모가 매우 커졌다.

박봉으로는 도저히 자식 공부 가르치기도 어려울 것 같아 차라리 자신이 그만두고 세탁기술을 배우고 부부가 열심히 하면 자식들을 가르칠 수 있겠다고 판단해 72년 4월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72년 경찰 사표 던져
세탁기술이 전혀 없었던 박종환씨는 사표는 던졌지만 막막했다. 세탁기술도 없었고 다림질 기술도 없었고 재봉 기술도 없었고 무엇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한심하기 그지 없었던 것.

그래서 남이 볼 새라 낮보다 밤에 유리창에 커튼을 치고 다림질을 배우고 재봉틀도 밟았다. 지금과 같이 세탁표시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물에 넣어야 할 것, 넣지 말아야할 것 등이 구별이 안돼 물에 빨아야 하는 것 벤젠으로 때를 빼야 하는 것 등 기술을 익히는 것이 급선무였다.

드라이를 했는데 때가 빠지지 않아 다시 세탁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손님이 요구하는 시간에 맞추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옷을 아예 망쳐놓아 변상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과 같이 다리미 기계가 좋은 것이 없어 쇠 다리미였었고 연탈 화덕 위에 삼발이를 놓고 그 위에 올려놓아서 데워 다림질을 했다.

지금은 다리미 바닥에서 직접 스팀이 품어져 나오도록 돼 있는 스팀다리미이지만 그때만해도 물을 입으로 품어서 다렸다. 구겨진 것을 펴기 위해 물을 품어 다리다가는 녹슨 다리자국이 남기 쉬워 여간 난처한 입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흰옷이라면 영락없이 물어줘야 한다.

당시 양복바지 하나 다림질을 하면 받는 요금이 50원 정도였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박종환씨의 보은세탁소는 보은에서는 웬만큼 세탁실력이 있는 세탁소라는 이름을 얻는다.

여전히 살림 피지 않아
형편 좀 피자고 경찰을 그만두고 구멍가게이지만 본격적으로 세탁업이라는 사업을 한 것인데 살림이 피기는커녕 오히려 더 쪼그라들었다. 청미서림 옆자리에서 김종수 내과 옆 사료가게 자리로 이전해 세탁소를 운영하는데 집세도 주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큰아들이 대학 다니고 그 밑의 자식들도 줄줄이 학교에 다녀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은 수업료를 가져가기 위해 집에 왔다가도 집세도 못주는 것을 보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가기 일쑤였다.

결국 집주인은 가계를 넓히겠다며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 집을 뺄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양 옆의 벽을 모두 허물었고 남들도 보면서 사정이 딱하다고 한마디씩은 다했다.

수중에 가진 것도 없었고 아는 친구로부터 빌린 40만원을 밑천 삼아 쫓기듯이 우체국 앞으로 옮겼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정도다.

지금의 터 50평 구입
세탁기계가 없어 펌프 물을 퍼서 비누로 빨래를 빨아 건조한 것이 1세대였다면 2세대는 세탁기계에 발전기 피대를 걸어 돌려야 사용했다. 소음도 대단했고 규모도 매우 작았다.

그래도 절약하고 절약하며 그 기계라도 운영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 생활한 탓에 세탁소를 하면서 동광초등학교만 있고 주변에는 모두 논이었던 지금의 동광초등학교 입구 현 보은세탁소 터 50평을 구입했다.

친구가 벽돌을 줘서 뒷방 하나 넣고 가게 하나에 방 한 칸 정도 딸린 25평 정도의 집을 지어 가게와 방은 세를 놓고 그동안 고생만 한 식구들이 조금 편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골방은 식구들이 살게 했다.

그리고 4, 5번 가게를 옮기며 남의 집을 전전했던 보은세탁소를 79년 비로소 지금의 집으로 옮겼다. 그러다 80년 수해를 입었으나 이곳이 지대가 높아 다행히 시장 터처럼 물이 채이지 않아 옷가지를 다락으로 옮겨 옷이 물에 젖는 등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

2000년 3층건물 신축
2000년 8월15일 박종환씨는 집을 헐고 3층 규모로 건물을 신축했다. 건물을 짓는 동안 세탁업은 아예 접었다. 세탁소를 하는 동안 하루 종일 서 있을 때도 있을 정도로 다리에 무리를 주는 경우 많아 무릎관절에 무리가 가고 하지정맥이 불거져 나오고 손목도 시큰시큰했다.

날씨가 궂으면 쑤시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다. 2000년12월 완공 후 입주하고는 세탁업을 아예 하지 않으려고 그동안 갖고 있는 기계는 모두 고물로 내다 팔았다.

처음 세탁소를 하면서 사용했던 발재봉틀이며 세탁한 중절모를 말리며 모양을 만들어주는 받침, 다리미대, 다리미 등 보은세탁소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있는 것들은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동안 지겹도록 했고 3층 규모의 건물에 아래층에 가게가 2칸, 2층에도 있고 3층에서 살림을 하면 세만 받아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때 세가 나가지 않았고 건물을 순전히 내 돈으로만 지은 것도 아니고 융자금도 껴 있기 때문에 이것도 갚아야 하고 또 건물 규모에 따른 전기소요량도 커져 임대가 나갔든 나가지 않았든 관계없이 지출되는 부분이 컸다.

그동안 벌어놓은 전 재산인데 잘못 될 수도 있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자 심적 고통을 겪은 박종환씨가 쓰러지기도 했다. 당장 돈이 아쉬워 정말 지긋지긋해서 접었던 세탁업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막내아들이 물려받아
당시 막내아들 박찬호씨(38)는 충북대 3학년1학기까지만 다니다 그만두고 대전 전문대에서 경영정보학을 공부하다 이것도 그만뒀다. 그리고 보은으로 들어와서는 몇몇 건설회사도 다녔지만 2001년부터 결국 아버지가 치웠던 세탁기계를 다시 차리면서 세탁해서 건조까지 돼서 나오는 자동시설로 설치했다.

대학까지 다닌 아들이 겨우(?) 세탁소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은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에 박찬호씨는 더욱 열심히 조금이라도 다른 업소와 차별화된 서비스전략으로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처음에는 옷감의 성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실패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인조가죽이 있고 실크인데 얼룩을 빼다 탈색을 시키기도 했고 외피가 본견인 오리털 이불을 물로 빨아 오그라뜨리기도 했다.

망가뜨렸으니 별 수 있나. 세탁을 한 내 잘못이니 변상을 해줄 수밖에. 이같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박찬호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세탁소를 순수 자력으로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웠다. 박찬호씨는 지금 읍내에만 22개 업소가 운영하고 있고 면단위에도 1,2개 업소가 운영하고 있어 사실상 인구나 시장 규모로 볼 때 업소가 많은 편이기 때문에 세탁기술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박찬호씨는 아버지의 가업인 보은세탁소의 간판을 내리지 않고 계속 걸려 있도록 사명감과 책임감때문에 어깨가 무겁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