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출신 지레나씨의 추석맞이
“송편, 차례음식 어렵지 않아요”
2005-09-15 송진선
지레나씨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않으면 과연 이 주부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다. 나이는 어리지만 시할머니와 시부모를 공경하며 시숙과 시동생 동서들과도 아주 살갑게 지내는 아마도 우리나라 여느 주부들보다 더 행복한 한국생활을 하고 있었다.
추석맞이 기사로 뭔가 좀 특별한 것이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외국인을 아내로, 며느리로 맞은 가정을 탐방해보자는 기획을 세웠다. 그리고 취재대상을 물색하던 중 어린 나이에 그것도 시골로 식구도 남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할머니에 시부모, 그리고 직장을 다니지만 장가를 가지 않은 시동생까지 층층시하의 대가족인 집에서 살갑게 살아가는 가정을 찾아냈다.
바로 산외면 길탕리에 사는 지레나씨 가정이다.
# 조리질하는 영락없는 한국 주부
지난 14일 보은군 여성회관의 박영옥여사와 함께 지레나씨의 가정을 찾았다. 아무래도 여성회관에서 외국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글교실도 운영하고 외국인 주부들을 관리하기 때문에 임의롭겠다는 생각에 동행 취재할 것을 요청, 흔쾌히 받아들여져 장장 3시간 동안 이것저것 가정생활을 담았다.
처음 지레나씨 집 문을 열었을 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된 집안과 소 등 가축으로 인해 파리가 많은 환경적 요인을 갖고 있음에도 집안에 파리 한 마리 없이 정갈했다.
살림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더 놀라움을 준 것은 점심준비를 하며 쌀을 씻고 있던 지레나씨가 아주 능숙하게 조리질을 하며 돌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요즘 정미기는 돌까지 고르기 때문에 보통 조리질을 하지 않고 또 나이 많은 노인 아니고는 거의 조리질을 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면 너무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남편이 따다놓은 싸리버섯, 능이버섯, 밤버섯과 감자를 넣어 끓인 버섯찌개에 고춧잎을 삶아 무치고 가지를 삶아 무치고 감자를 채 썰어 고추와 적당히 색을 갖춰 튀김가루를 묻혀 감자 튀김까지 했다.
감자 튀김은 주방에서 하면 실내에 냄새가 밴다는 것을 아는지 밖에 별도로 있는 휴대용 가스레인지에서 조리해서주방으로 들어오는 센스까지 보여줬다. 지레나씨가 점심을 준비하는 시간에 방문한 탓이기도 하지만 식구들이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시간이 될 때까지 시할머니 상은 어른이라고 별도로 상을 준비하는 지레나씨를 바라보며 현대 한국 여성에게서 보지 못하는 면을 발견했다.
며느리 시집살이가 심하고 심지어는 시부모 학대까지 나오고 아예 결혼 할 때부터 장남이더라도 분가를 조건으로 내세우는 등 시부모는 아예 모시지 않는 것이 정석이 돼 버린 요즘 우리나라 주부들과는 천양지차의 모습이었다.
# 송편 잘 빚어 “딸낳으면 예쁘겠네”
설거지를 할 그릇도 많이 나왔다. 자기 가족들만 챙겨도 한 상인데 두 명이 입을 더했으니 싱크대에는 씻어야할 그릇으로 수북했다. 그래도 앉아서 먹기만 한 사람들에게 후식으로 커피도 내오고 사과와 배도 깎아 내오며 자꾸 권했다. 후식을 먹는 동안 점심 식사를 한 그릇들을 씻고 말끔하게 설거지를 한다.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조금도 꽤 부리지 않고 닥친 일을 후딱후딱 해치웠다. 이제는 송편을 빚을 시간. 점심식사를 마치고 하우스 안에서 풀을 뽑고 있는 시할머니도 모셔놓고 시어머니가 떡 반죽한 그릇에 달려들어 반죽한 것을 가운데 깊게 홈을 파고 그 안에 고물을 넣고 송편을 빚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는 속담처럼 “딸을 낳으면 엄마를 닮아 예쁘고 애교도 많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시집와서 추석 두 번, 설 두 번을 지낸 지레나씨는 “송편 만드는 것 재미있어요. 그리고 밀가루에 물 넣어서 채소도 넣고 파도 넣어 부치는 전 만드는 것도 재미있어요”하며 솔잎을 깔고 그 위에 예쁘게 빚은 반달 송편을 가지런히 놓았다.
명절 증후군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주부들이 명절을 두려워하고 시골인 보은에서도 송편은 사다 쓰는 가정이 많을 정도로 편리함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로 볼 때 “정말 복덩어리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어머니인 송금용(71)씨도 며느리 지레나씨가 “눈썰미도 있고 가르쳐 주는 대로 잘 하고 뭐든지 하려고 하니까 이쁘고 고맙고 동서들과도 잘 지내고 시숙과 시동생한테도 잘하는 것을 보면 저런 복덩어리가 어디서 왔나 싶을 정도”라며 며느리 칭찬에 침이 말랐다.
그러면서 “나는 옛날에 제사를 일년이면 12번 지내고 제사밥으로 쌀 한 말까지 했을 정도로 종부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시사도 올라가고 후손들이 가져가서 이제는 5번이지만 우리 둘째 며느리인 지레나가 어려워하지도 않고 큰동서와 제사음식도 잘 만든다”고 말했다.
# 한글공부 열심히 하는 학구파
지레나씨의 한글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매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여성회관에서 외국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한글교실에 나가 한글 공부를 한다.
1학년 때 큰 네모 칸에 한 자 한 자 눌러 쓰던 추억의 공책에 빼곡이 칸을 메워 나가는 지레나씨는 글씨도 참 예쁘게 썼다.
“ㄳ, ㄶ, ㄺ과 같은 글씨는 어려워요, 너무 어려워요”라고 강조하면서도 열심히 교과서를 보고 잘 쓴다. 지레나씨가 한국으로 시집온 것은 지난 2003년 6월19일이다. 산외면 길탕리 7남매 중의 둘째인 정종구씨를 신랑으로 만나 우즈베키스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에서 9월에 다시 예식을 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엘레나이지만 충주 지씨이기 때문에 이름을 지레나로 바꿨다.
처음 한국에 와서는 한국 음식과 좌식 생활이 적응이 안돼 피자와 빵, 과자가 주식이었는데 아침 6시에 일어나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여느 가정 주부와 같은 한국인이 되었다.
인삼포 1000평, 하우스 600평, 논 2000평, 고추 600평 농사를 짓는 남편과 함께 고추도 따고 밭에 풀도 뽑고 큰 형님네 사과 과수원에 가서 일도 하고 지난 여름 밤에는 개울가에서 올갱이도 잡는 등 거의 남편과 떨어져 있지 않는 잉꼬부부이다.
시아버지 정완기(71)씨로부터는 하동 정씨 가문에 대해 이 것, 저 것 배우고 시할머니 목욕도 시켜드리고 머리도 깎아드리고, 말벗도 해드리는 착한 손자며느리요 며느리이다.
시부모는 물론 시숙, 시동생, 동서 생일은 꼭 달력에 체크해 놓았다가 축하해주고 한글 공부 때문에 여성회관에 나오거나 볼 일이 있어서 남편이랑 밖에 나오더라도 점심때가 되면 꼭 전화해서 식사했느냐고 전화를 하는 살가운 며느리이다.
처음 시집올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국제전화를 했는데 이제는 이곳 생활에 적응이 돼서인지 3일에 한 번도 하고 1주일에 한번 도 하고 열흘에 한 번 할 정도다.
지난 8월27일에는 바로 아래 여동생이 지레나의 집에 놀러와서 15일 정도 머물다 갔다. 함께 고추도 따면서 일도 하고 여성회관 박영옥씨와 동행해 속리산에도 놀러가고 그곳에서 국수도 사먹는 등 추억을 만들었다.
시부모를 엄마, 아빠라 부르고 남편은 여보라고 부르고, 손아래 동서한테 남편이 제수라고 부르자 자신도 제수라고 부르는 25살 귀여운 주부다.
하동 정씨의 종가에서 층층시하 시어른, 시동생과 어우러져 매일 웃음보를 터뜨리고 만들며 살고 있는 지레나씨는 2005년 추석맞이로 분주했다.
<세상사는 사람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