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원정 도편수 김용하씨

출발은 늦으나 내노라하는 실력의 대목수

2005-09-09     송진선
편리함 때문에 전통 한옥보다는 양옥을 추구해 한옥은 사실상 박물관에서 들어가야할 소재가 될뻔한 한옥이 되살아 나고있다.

최근들어 한옥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생기고 한옥에 대한 문화체험 프로그램에다 한옥을 이용해 민박을 운영하는가 하면 흙이 몸에 좋다는 것과 맞물려 흙장을 쌓아 대들보와 서까래, 기와를 얹은 기와집도 성행하고 있다.

또 직접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건축학교가 생기는 등 취향에 맞는 집을 건축할 수 있는 정보를 취득하는 것은 크게 개방됐고 다양해 졌다. 날에는 무조건 전문 기술자 밑에서 수년간 시키는 일만 해야 했고 수년간 죽은 듯이 시키는 일만 해도 그 기술을 전수받기가 어려웠다. 맛을 내는 중요 비법은 며느리도 모른다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마로면 원정리 보리골 마을에 사는 도편수 김용하(76)씨도 지금의 도편수(대목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세월을 눈치밥, 눈물밥을 먹었다.

더욱이 나이를 먹어도 한참 먹은 51세에 도편수가 되어 보겠다고 시작했으니 그 속에서 느낀 아니꼬움이 보통 사람들 보다 더 컸을 터이지만 꼭 하고 싶었던 소망이었기 때문에 인내가 중요했다. 렇게 선천적인 자질과 눈썰미 등 남보다 뛰어난 감각으로 11년만에 도편수 자리에 올랐다.

도편수가 된 후 그가 지은 집은 원정리 보리사 종각을 비롯해 보은 누청리의 선원사, 광혜원에 있는 사찰, 마로 갈평의 김해김씨 제실 등 전통 사찰과 제실을 많이 지었으며 가장 최근인 2003년에는 속리초등학교 뒷 편에 육각정을 지었다.

80년 아버지 작고후 목수일 배워
평북초산이 고향인 김용하씨는 아버지를 따라 41년경 강원도 삼척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16세때 18살이었던 아내 김지란씨와 혼인하고 54년 마로면 원정2리 보리골로 이사를 나왔다. 원도 산골에서 평야지를 찾아온다고 해서 온 것이 마로면 원정이다.

원래 취미도 희망도 목수였는데 군대에 가서는 목공일 하는 것을 보고 사호에 나가서 이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다졌으나 농사짓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반대로 꿈을 잠시 접어뒀다.

소유하고 있는 땅도 적었고 남의 땅을 얻어서 담배도 6단까지 하는 등 열심히 농사를 지었지만 가세가 피지 않았고 겨우 배를 곯지 않는 수준에 불과했다.

아마도 김용하씨가 원했던 대로 일찍 기술을 배워 독립했다면 이보다는 생활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늘 했지만 한 번도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않은 외아들은 집을 뜨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가 작고한 80년대 동네에서 목수 일을 했던 사람 밑에서 목수 일을 배우고 자격증까지 갖춘 도편수에서 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충남 예산의 박상천씨 밑에서 일을 배웠다.

김용하씨는 박상천씨 밑에서 10일이 채 안되게 있었지만 중요기술을 많이 배웠고 실력을 키우는데 크게 도움이 됐다. 시 집에 돌아와서는 보은읍에 있는 사람에게 또 기술을 배우는 등 도편수가 되기 위한 과정을 모두 익혀 91년 독립했다.

그동안은 도편수는 따로 있고 김용하씨는 그 밑에서 도편수가 설계한대로 건축하는 일만했던 것에서 도편수인 자신이 직접 설계하면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집을 짓는 것이다.

흙장에 기와 얹는 것 전통 한옥 아니다
기자의 무식함이 탄로가 나는 순간이었는데 전통 한옥을 흙벽돌을 쌓고 대들보와 서까래를 얹어 기와를 얹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런데 외속리면 하개리 99칸 집등 우리가 한옥이라고 하는 것은 흙벽돌로 지은 집이 아니다.

지붕은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리고 도리(대들보에 직각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둘러 얹혀서 연직하중 또는 수평하중을 받는 가로재)를 놓고 그 위에 서까래를 올리고 그 위에 다시 산자(흙을 바를 때 떨어지지 않도록 나무와 판자 등을 끼우는 것)를 엮고 흙과 강회를 섞은 보토를 바르고 기와를 올린다.

벽체는 흙벽돌을 쌓는 것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사이에 하방, 중방, 상방을 걸고 벽 사이를 산자로 엮고 짚을 섞은 흙으로 바른 다음 회칠을 한다. 붕과 벽체를 끝낸 다음 방안을 정리하는데 구들을 놓고 마루를 깔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 한옥이다.

또 힘을 받는 것과 힘을 덜 받는 것까지 감안해 목재를 선택해야 하고 세우는 기둥과 얹는 기둥의 굵기도 조절해 균형을 잘 맞춰야 몇 백년이 가도 끄떡없는 전통 한옥이 되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목재로 지은 집이 있으면 일부러 가서 본다는 김용하씨는 요즘 나무 건축을 지은 것을 보면 기둥과 대들보의 비율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무와 나무를 연결할 때 홈을 파서 기우는 것이 아니라 철근을 휘어서 연결하는 등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을 보면 눈에 거슬리면서 부실공사 하는 것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찰이나 제실을 지으면서 종이에 몇 년도, 몇 월, 며칠에, 도편수는 누구고, 부편수는 누구고, 제실의 경우 문중내역을 적고 사찰의 경우 주지승, 시주자 등을 기록해서 들기름을 먹여 대들보에 구멍을 내서 그곳에 넣는데 다시 지을 때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게 만드는 것인데 사후에라도 자신의 이름을 욕 먹이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지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 도편수로서의 자존심이 느껴졌다.

이렇게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도편수 김용하씨는 멀리 떠나지 못하고 하루에 볼일을 보고 다녀올 수 있는 거리까지만 일을 하고 또 늦게 시작해 자격증 취득시험을 보지 못한 김용하씨는 관공사 입찰에 응하지 못하고 개인 사찰이나 제실을 짓는 것 밖에 못해 고급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큰돈을 벌지 못했다. 래도 슬하의 4남3녀의 자녀들이 건강하고 또 먹고는 살만 하니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주어지는 일에 만족하고 있다.

꼼꼼한 성격 천상 목수
처음 그의 집을 들어가면서 부터 느껴졌던 깨끗한 것을 보니 성격이 매우 꼼꼼하겠다는 선입견이 취재하는 내내 재삼 확인했다. 풍이 지나가고 모처럼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날 띠끌 하나 없이 깨끗한 마당 위에서 김용하 부부는 고추를 말리고 고추를 쪄서 가루를 묻혀 말리고 있었다.

농촌의 여느 주택 처럼 낡기는 했어도 그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43년전 흙벽돌을 찍어 계모임을 하는 친구들과 함께 지은 집에 외벽을 시멘트 콘크리트로 발랐다고 날짜를 새겨넣었고, 굴뚝을 시멘트 벽돌 쌓은 것은 몇 년도인가, 아랫 채 시멘트 외벽은 언제 발랐는가, 슬레이트 지붕을 걷어내고 함석은 언제 했는가 등 재시공이 들어가면 모두 날짜를 새겨넣었다. 꼼꼼함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그의 연장 통은 꼼꼼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창고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크기 별로 네모 만든 연장 통은 차곡차곡 창고 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손잡이까지 깔끔하게 달아놓은 것을 보니 다른 것은 보지 않고서도 그의 직업이 목수임을 단 번에 느껴졌다.

이 뿐만이 아니다. 보통 시골집 안방에는 낡고 오래된 사진부터 자식들 대학 졸업사진 자식들 결혼사진 손주들 백일, 돌 사진까지 걸어 가족사를 볼 수 있다. 용하씨 집 마루에도 이같은 사진이 빼곡하게 걸려있는데 그냥 걸어놓은 것이 아니다. 규격대로 크기에 맞춰 차례대로 걸어놓았는데 삐뚤어진 사진 틀 하나 없다.

약간 비뚤어지기도 하고 먼저 건 것이 작고 나중에 만들어진 사진이 크면 그대로 거는 것이 보통인 가정과는 정말 다른 모습이다. 의 손이 간 것은 모두가 누가 목수 아니랄까봐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꼼꼼함이 배어나왔다.

남편이 이렇게 꼼꼼하면 힘들지 않느냐고 부인을 떠보았지만 역시 부창부수다. 자신도 꼼꼼하단다. 같이 깨끗하고 꼼꼼하니 집안이 반들반들 빛이 났다.

<세상사는 사람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