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노모 장수상 차린 수한 교암 김영식씨
어머니 앞에 간 후손이 한명도 없으니 큰 복이지요
2005-09-02 송진선
100세까지 산다는 것은 세상과의 싸움이다. 자기 몸과의 싸움이고 주변 사람들과의 싸움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병에 걸려서 쉽게 세상을 뜨고 주변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스트레스로 인해 생명을 단축시키게 된다.
그래서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100세 건강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100세 노모의 생신날 장수상을 차려 주위사람들에게 대접을 한 효자 김영식 노인회장의 가정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옛날 초가 삼간의 구조에 헛간채 앞에는 삽살개가 놀고 할머니가 사용할 법한 요강이 변소 앞에 놓여져 있다.
그저 평범하게 자식 잘 낳아 사회에서 모두 제 역할을 해내는 일꾼으로 키워 낸 보통의 가정이었다.
하지만 현재 100세 할머니의 슬하의 아들·딸이 결혼해서 손자를 낳고 그 손자가 결혼해서 또 아들·딸(증손)을 낳고 그 증손이 결혼해서 아들·딸(고손)을 낳았으니 슬하에 4대까지 이어져 그렇게 이뤄진 가족만 해도 50여명이 넘는 다복한 가정이었다.
100세 노모 봉양한 효자와 조우
젊은 나이에 혼자돼 슬하의 자손들을 훌륭하게 키운 100세 노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지난 호에 보도된 수한면 교암리 마을 소개를 위해 취재를 하면서 김영식 노인회장이 8월24일 노모의 100세 장수 생신상을 차린다는 것을 듣고 취재를 하게 된 것이다.
완전히 사생활이니 취재를 거부해도 무어라고 할 말이 없을 텐데 그리고 김영식 노인회장이 설사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자녀들이 반대하면 취재활동을 모두 접어야 하는데 자녀들도 아버지가 취재에 응한 것이니까 하고 매우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부모님을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고 그만큼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보여준 행동이 매우 모범적이고 절대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했음을 느끼게 했다.
마을 회관에는 김영식 노인회장 자녀들이 시원한 콩국수와 과일, 술, 음료수, 떡 등 푸짐한 상차림으로 주민들을 대접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할머니들 대로 할아버지들은 할아버지들 대로 따로 상차림을 하고 손님을 맞았다.
때가 때인지라 추석 전 조상의 묘를 금초하기 위해 각 가정마다 아들 및 사촌, 5촌 등이 많이 방문해 한꺼번에 동네 주민들이 모여 음식을 나눌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집안 일도 바쁘고 한기 어디서 먹든, 무엇을 먹든 안 먹어도 그만이겠지만 김영식 노인회장의 성의에 고마워 하며 늦은 시간에도 미을회관에 들러 100세 장수상 차림을 받았다.
원래 오정리가 고향이고 그곳에서 60년을 산 김영식 노인회장은 고향 주민들에게도 음식을 대접했다.
푸짐하게 차려놓은 음식을 대접받은 오정리와 교암리 주민들은 김영식 노인회장의 노모의 생신을 축하하고 건강을 기원하면서 다들 김영식 노인회장과 그의 부인이 효자효부라는 칭송을 빼놓지 않았다.
특히 100세된 시어머니를 약간 나이가 적은 꼬부랑 며느리가 모셔온 얘기는 김영식 노인회장의 형제들에게는 눈물샘을 자극하게 했다.
효자 밑에 효자아들 나오고 효손 나온다고 아버지, 어머니의 효성을 보고 배운 자녀들이 그 것을 본받고 또 그의 자녀가 본받는다는 옛 얘기가 하나도 그르지 않음을 느꼈다.
100세 노모도 효부
이날 100세 장수 생신상을 맏은 김영식 교암리 노인회장의 어머니 정귀분(100)할머니는 청원군 문의면에서 14살 때 자신보다 10살 많은 수한면 오정리 김홍진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온다.
가난한 집안이었다. 시부모와 시동생, 시누이와 슬하에 2남3녀의 자녀까지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고 때 거리가 없을 때는 남의 집 음식을 얻어다 그것을 한꺼번에 다 먹지 않고 여러 때를 해결하기 위해 밥 한줌 넣으면 이것 저것 푸성귀를 더 많이 넣고 끓인 죽으로 요기를 하게 했다.
나는 못먹어도 시부모와 시동생, 자녀들의 배고픔을 가시게 한 그런 분이었다. 거기다 장가를 간 시동생이 슬하의 자녀 둘을 두고 일찍 세상을 뜨자 나이 젊은 동서는 개가를 했고 어린 조카들까지 자신이 데려다가 부모 노릇을 했다.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위하고 자녀들을 키우면서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정을 나누며 살았으나 어머니가 43세때 아버지(53세)도 돌아가셔서 졸지에 어머니는 젊은 여자 가장이 돼서 집안을 꾸려가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다.
김영식옹이 19살때이다. 그의 막내 여동생이 3살 때이다. 어머니와 함께 동생들의 아버지 노릇까지 해가며 밭을 일구고 작물을 심고 수확을 해서 식구들을 보살폈다.
어머니가 하는 것을 장남 김영식씨가 그대로 본을 받았고 22살때 18살의 보은읍 교사리 처녀 이복례씨와 결혼 가정을 이뤘다.
맏이라 공부도 못하고 동생들 돌보고, 밥하고, 빨래하는 것이 일이었던 이복례씨가 시집와서 보니 가난한 집이었지만 시어머니가 재도 쳐주고 아침 일찍 물도 데워주는 등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시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셔서 안 계시고 시어머니가 가장이 돼서 집안을 꾸려가면서도 어려운데 시집와서 고생한다며 늘 등을 토닥여주고 시동생들과도 우애있게 지낸다고 칭찬하는 등 친정 첫 나들이 때 시집이 더 좋다고 할 정도로 시어머니의 정을 듬뿍 받았다.
하루 종일 허리 펼 사이도 없이 담배농사를 짓느라 지게로 져 나르고 연탄을 비벼서 불을 피워 담배를 말리는 고달픈 농사일이었지만 그래도 며느리 이복례씨는 시집의 가풍이 좋았고 시어머니의 내리사랑, 시누이와 시동생이 보여주는 형제간의 우애 등이 좋았다고 한다.
김영식씨의 이같은 가정사를 알고 있는 오정리 주민들은 효부도 그런 효부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칭송했고 그렇게 효성을 보였으니 그렇게 자식들에게 효성을 받고 대접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귀분 100세 할머니의 슬하의 2남3녀는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랐다. 맨 위가 딸(81세, 수한 성리)이고 둘째가 아들 김영식(76세)씨, 셋째가 딸(69세)이며 네째(65세)는 아들, 다섯째(60세)가 딸인 이들은 100세인 어머니 생일날 모여 그동안 어머니를 잘 모셔온 올케와 오라버니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특히 자신이 젖먹이인 3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커녕 얼굴 조차 기억에도 없고 오빠를 아버지처럼 의지했던 막내 여동생은 이날 오빠 김영식씨를 안고 고맙고 안타까움의 눈물을 쏟아냈다.
가족사진을 찍겠다고 뒤늦게 김영식씨 집을 찾아간 기자의 눈물샘까지 자극해 참느라 혼이났다.
그때 아들 대학공부시킨 사람 몇 안돼
정말 먹을 것도 부족한 때였다. 때거리도 없는데 학교가 무슨 대수인가 할 정도로 까막눈만 깨우치면 자식들을 학교보다는 들판으로 내몰던 때였다.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가르쳐도 많이 가르쳤다는 소릴 들었고 고등학교 진학은 저 먼 서울로 유학을 가는 것 만큼 어려웠다.
당시 몫돈을 마련하기가 가장 쉬운 담배 농사를 건조실 2개에 쪄낼 정도로 많이 졌지만 농협에 진 빚의 원금은 아예 갚을 생각도 못하고 농협 이자를 꿔나가는 것만 해도 다행인 시절이었다.
김영식씨는 담배농사를 많이 지어 빚을 갚는 것보다 자식들에게 투자했다. 이복례씨와의 사이에 둔 3남2녀의 자녀 중 아들 3명을 모두 대학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당시 수한에서 대학공부를 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대학공부 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던 때였다.
그래서 큰 아들 응철씨(50세)와 둘째 아들 응만씨(48세)는 중등교사이고 세째 아들 응길씨(45세)도 장사를 하고 있으며 맏이인 큰 딸 응오씨(52세)와 막내 딸 응옥(43세)씨도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시집 잘 가서 시부모한테 사랑받고 남편 사랑받으며 잘 살고 있다.
동네 사람들, 특히 60년간 살아온 고향 오정리 주민들은 김영식씨의 이같은 자녀교육에 대한 신념에 지금도 박수를 보내곤 한다.
가난해 밥동냥(?)까지 해가면서 그의 어머니가 그를 키웠는데 김영식씨가 똑똑해 자식들을 대학공부 시켜 놓으니 이제 대접을 받는 것 아니냐고 부러워하고 있다.
실제로 몇 평 안되는 땅을 갖고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큰 아들은 김영식씨가 60세때 벌을 사드려 밀원이 좋은 교암리로 이사까지 시켜드렸다.
지금은 돈도 안되고 고생만 하는 땅 대신 벌을 키우며 노후를 보내고 있는 김영식씨는 100세인 어머니가 작년까지만 해도 바깥출입을 하며 이웃에 마실도 가고 담 밑의 풀도 뽑았는데 올 봄부터 부쩍 기력이 쇠해져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대소변도 요강에 보는가 하면 기저귀에 실례를 하는 날도 많지만 효자효부인 김영식씨와 며느리 이복례씨는 배설을 잘하는 것도 복이라며 어머니 보살핌에 한 눈을 팔지 않는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복이 많으신지 어머니 아랫대로 먼저 세상을 뜬 후손이 한 명도 없어 어머니가 험한 꼴을 안봤다”며 김영식씨와 이복례씨는 이점을 가장 고마워 했다.
세상에 교통사고도 많고 암도 좀 많이 걸리는가. 그래도 슬하의 자식 하나 앞서 보내지 않고 100세 천수를 누린 정귀분 할머니이다. 슬하의 자손들에게 아직도 나눠줄 사랑이 많은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사는 사람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