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회 재경보덕중학교 동문회장
매사 똑소리나게 한다는 소신으로 회사 경영은 물론 동문회도 성장 거듭
2005-06-24 송진선
고향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그 크기가 얼마나 될까. 나의살던 고향은 보은이지만 고향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어머니 얼굴이 아닐까.
그저 자식들 잘되라고 매일 기원하고 자신은 배를 골아도 자식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는 하해와 같은 사랑이 우리의 고향에는 있다.
고향, 어머니 모습이 모두들의 가슴에 절절히 박혀있는 보은에는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받고 대처로 나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당당히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사회의 주역들인 것이다.
현재 재경보덕중학교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는 구운회씨도 자기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알려진 인물이다.
전문용어이지만 에어커튼이라는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빌딩 등 대형건물 출입구에 냉기가 쏟아지게 만드는 제품을 생산하는 (주)동광에어커튼을 운영하고 있다.
동종업계에서는 매출이나 인지도나, 기술면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기업이다.
구운서 전 마로면장 사촌 동생
마로면 관기리 출신인 구운회 회장은 능성 구씨, 흔히 우리가 부르는 ‘관터 구씨’이다.
옛날에는 너 성이 뭐냐고 어른들이 물을 때 ‘관터 구씨’라고 답하면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면서도 그것만으로도 통했다.
태어나면서 저절로 얻어지는 신분(?)으로 불로소득을 얻었을 때 90년에 작고한 고 구광서씨의 2남3녀 중 장남, 그것도 종손이었으니 그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을 것이란 것은 짐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집안이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운회 회장은 일찌감치 기술을 배워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관기초등학교(37회), 보덕중학교(8회)를 졸업하고 인문계를 진학하는 대신 청주 기계공고(14회)를 진학했다.
펜 굴리는 직업을 갖기를 희망했던 부모님들은 자신들이 뒷바라지를 못해 자식이 기름밥을 먹게 했다며 안쓰러워했지만 손재주가 뛰어나고 적성에도 맞았기 때문에 작업복에 까만 기름칠을 하고 손에도 기름때 묻히는 그의 직업을 소중히 여겼다.
엔지니어가 꿈이었기 때문에 대학교 진학을 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냥 희망사항으로 남겨두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제대 후 곧바로 취업을 했다.
궐련제조기, 자동차 부품, 선박 부품을 만드는 등 숙련공으로 경력을 쌓아갔다.
그리고 직장생활 12년하고 남의 밑에서 평생 일을 하느니 기술만 있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겁없이 그것도 무모하리 만치 일을 저질렀다.
85년 동광산업 설립
자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품을 판매할 판매처를 확보한 것도 아니고 인과관계를 많이 맺어놓은 것도 아닌 토대였기 때문에 ‘저질렀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 평가하는 것이고 매사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사고에 사전 시장의 흐름 등을 파악한 치밀한 그의 성격으로 봐서는 적기였던 1985년 에어커튼 제조회사인 동광산업을 설립한 것이다.
에어커튼은 흡입구로부터 들어온 공기가 팬의 Impeller에 의해 가속되어 취출구로 내보내지며, 이 공기는 취출구에 부착된 풍향조절 Damper에 의해 외기의 강약에 대비하게 된다.
취출된 공기는 인체에 불쾌감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풍속을 선정하고 상에서 하 또는 측방, 하에서 상으로 설치하게 되는데 공기 토출 폭에 따라 일정한 공기막이 형성된다.
에어커튼이 설치되면 열 보호 및 냉기 보호뿐만 아니라 방진, 방습, 방충, 방취 등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와 에어커튼을 생산하기 시작한 당시만 해도 에어커튼이 생소해 제품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3년간 시장을 개척하는데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에어커튼 없는 곳 없을 정도 회사 성장
발 품을 팔아 영업을 해 처음 한양쇼핑센터에 제품이 설치되고 그 다음 현대백화점에 설치되면서 입소문이 퍼져 대형 빌딩마다 에어커튼 주문이 쇄도했다.
신세계, 롯데 등 전국의 거의 모든 백화점, 농협 하나로 클럽과 이마트 등 할인점, 기업의 빌딩, CGV 등 영화관, 공장, 광화문 우체국 등 관공서, 영동포 역사 등 철도 역사, 호텔, 병원, 쓰레기 소각장, 분뇨처리장 도곡동 타워팰리스 등 동광에어커튼이 설치된 곳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반화됐다.
그만큼 동광에어커튼은 이 분야에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모두가 기술과 신용을 무기로 내실경영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결과 구로에 본사를 두고 공장은 1995년 시화공단에 신축이전한 후 1997년 4월 (주) 동광에어커튼 법인으로 전환했다.
고객에게는 쾌적함을, 사원에게는 작업환경 개선을, 경영주에게는 경비절감의 필수품이라는 목표를 갖고 기술개발에 전력, 1997년 6월에는 Q 마크를 획득하는 등 품질보증업체로 지정됐으며, 99년 4월 처음으로 그리스에 수출을 하고 12월 2차 수출한 후 2000년 3월 중동 요르단에까지 진출하는 등 사세가 크게 확장됐다.
시장이 넓지 않다며 눈을 해외로 돌려 수출시장을 뚫은 그의 경영능력은 어깨도 좁고 살집이 없는 아주 왜소한 몸이 전혀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그래도 수 십년간 서울 물 마시며 서울 사람으로 살았지만 별 수없이 구 회장은 어릴 적 꿈을 키웠고 형제들 싸우면서 컸고 친구들과의 추억이 서려있는 마로면 관기리 ‘촌사람’이다.
수년간 재경 8회 동창회장을 맡아 동창회를 활성화시키는데 노력했던 구회장.
이제는 영역을 더 넓혀 재경보덕중 동문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동문회 활성화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감수하는 그는 올해 산악회원들의 산행도 동문회 일정에 맞춰 문장대 무박산행을 이끌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동문들이 모교를 밟았다. 그의 진가를 보여준 행사였다. 가족으로는 부인 이순임씨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두었다.
<나의살던 고향은 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