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꿈 접고 공직 입문한 이응표주사

자료 전시관이나 영화 포스터 박물관 건립 전시가 꿈

2005-04-29     송진선
얼마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로 알려진 ‘광화문’ 서체에 대한 철거 논란이 일었을 경우에도 박대통령 서체로 바꾸기 전 원본 자료 사진을 확보해 논란을 잠재웠던 적이 있다.
그만큼 기록의 역사적 가치가 높다.
빠르게 흘러가 버린 과거의 문화가 지금 기록물로 남아있는 게 얼마나 될까.
보은군청 행정 6급인 이응표주사는 기록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기록물 수집으로 생을 함께 해왔다.
그가 갖고 있는 기록물 중 아마 영상자료원에도 없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할 정도다.
사진과 비디오물, 그리고 영화포스터, 각종 공연 홍보 팜플렛, 초대장 등 다양한 기록물이 1000여 점이나 된다.
그가 갖고 있는 자료를 보며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 본다.

영화간판 그리는 것 보고 자라

현재 보은읍 삼산1리 뻥튀기 하는 곳에 있었던 보은극장이 불에 타 60년대 불종대(불이 났을 때 올라가서 종을 치던 곳) 있는 곳으로 이전을 해왔다.
극장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살았던 그는 어릴 때부터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보는 것만으로 재미가 있어서 거의 모든 영화를 보았을 정도로 영화광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5원을 주고 삼산초등학교와 보은중학교 학생들이 빨간 마후라라는 방공영화를 단체 관람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 ‘미워도 다시 한 번’ 영화는 보고 또 보고 수 차례 봤을 정도로 주인공 문희에 흠뻑 빠졌고, ‘별아 내가슴에’라는 가수 남진이 나오는 영화는 지금의 OST에 해당하는 주제곡을 담은 LP판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영화를 보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또 하나 간판장이가 실물처럼 그려대는 문희, 남정임의 얼굴을 보고 가슴앓이도 하고 직접 그려보기도 하며 사춘기를 보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예술성이 풍부한 그는 그림에 심취했고 그리는 것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 때 미술부장을 지냈고 보은중학교에서도 미술부장을 지냈다. 옛날에는 문화예술 분야의 ‘장이’에 대해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모님은 공부하라고 그림도구를 버리기도 하고 혼도 많이 냈다.
그러나 그럴 수록 그의 그림에 대한 사랑은 더욱 커졌고 숨어서 그림을 그리는 등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만화에 심취해 만화가가 되겠다고 나름대로 진로를 결정했던 그는 보은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은농고로 진학한 것이 아니라 5년제로 예술대인 인천전문대 미술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만화가 이현세씨가 나왔던 만화영화사인 (주) 대원동화에 취업, 수습 3개월을 지내며 만화를 그렸다.
각종 산업 디자인 공모전에도 응모해 금상, 장려상 등 많은 수상 경력이 있었지만 당시 디자인 회사, 만화제작사들의 재정형편이 어려워 84년 만화가의 꿈을 접고 공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고 싶은 것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한 것이고, 성취력도 높고, 일의 능률도 높은데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그는 틈틈이 그림도 그리고 만화도 그렸다.

영화포스터 초등학교때부터 수집

초등학교 때 그저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할 줄 알았던 때 또래 아이들이나 남들과 다른 기특한 생각을 했다.
그것은 영화포스터를 모으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영화간판을 그리는 아저씨들이 애써 그린 것이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것이 아까워서였다.
영화 홍보를 위해 영화 포스터는 읍내의 경우 집 대문에도 꽂혀져 있었고 그것은 그가 영화 포스터를 수집하는데 좋은 기회를 줬다.
손쉽게 포스터를 손안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한 것이 영화 포스터만 200여점에 달한다.
포스터는 지금처럼 사진으로 제작한 것이 아닌 사람이 그린 그림을 이용한 포스터였기 때문에 포스터를 펼치니 특유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사람이 터치한 부분이 느껴져 정겹게 다가왔고 흡사 실물과 똑같은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 그들의 능력이 옛날 포스터를 보고 놀라는 사실이었다.
영화 포스터를 모은다는 것이 알려져 예대를 나온 그의 친구들이 포스터를 수집해 보내오기도 하고 일부러 청주나 서울 충무로 등을 다니며 포스터를 수집하기도 했다.
그래서 현재 그가 갖고 있는 포스터 중에는 아주 귀한 것이 많다고 한다. 영상 자료원에도 없을 포스터를 그는 갖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할 정도다.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했고 또 그 만이라도 자료를 갖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
그가 수집한 것은 영화 포스터뿐만 아니라 비디오물도 많다. 기록물로써 시간이 많이 흘러 3, 40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의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문예회관 공연작품 팜플렛도 수집

문화예술 공연의 장이 마련돼 보은군의 취약한 분야였던 에술 공연이 많아졌다.
1년이면 가수들을 초청한 공연, 오케스트라 연주, 연극 공연, 군악대 공연 등 다양한 장르로 수십 차례 각종 공연이 이어졌다.
각종 공연이 있을 때마다 홍보를 위해 포스터와 팜플렛이 제작돼 역시 영화 마냥 시내 주요 장소에 붙여졌고 주요 배부처에 놓여져 포스터와 팜플렛은 농촌지역 주민들을 공연당일 문화예술회관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1994년 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한 지 11년째이니 공연을 안내해준 팜플렛도 상당하다. 그 중에는 미술을 전공한 것을 살려 4, 50개는 직접 디자인까지 했다.
지금 하나도 빼놓지 않고 팜플렛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문화예술회관에서도, 문화원에서도, 군청 문화예술담당 부서도 이같은 자료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단 한 명 이응표씨는 영화 포스터를 수집했듯이 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오른 각종 공연작품에다 속리산 단풍가요제 등 팜플렛과 초대장 등을 모으기 시작했다.
수집의 변은 비싼 돈을 주고 초청해오고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어도 아무 기록 없이 지나고 나면 흔적이 없기 때문에 그는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자료를 수집하는 것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습기가 차지 않도록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팜플렛을 놓고 영화포스터는 한 장 한 장 비닐을 씌워 보관할 정도로 애지중지 정성을 쏟으며 세심하게 관리하는 그는 별 쓸모도 없는 것들을 가져온다는 가족들의 성화를 견뎌야 했다.
자료는 계속 늘어나고 보관하는 장소는 한정돼 있고 그냥 재활용품으로 내놓으면 빨래비누나 휴지로도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아닌가.
지금은 가족들도 귀중한 자료라는 것을 이해한다.

속리산 단풍가요제 만들어낸 주인공

95년 가을 속리산 단풍길을 걷다 단풍이 쏟아지는 것에서 착안해 행사를 기획한 것이 바로 단풍 가요제이다.
속리산 조각공원을 기획해 만들어 냈던 그는 아름다운 속리산의 단풍을 주제로 행사를 개최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96년 보은에서 개최한 1회 보은 단풍가요제는 500만원 규모였고 2회 때에는 개최 장소를 속리산으로 옮겨 속리산 단풍가요제로 전환했고 단풍 무용제까지 규모가 확대됐으며 3회부터는 전국대상으로 확대돼 올해 10회 째를 맡고 있으며 예산도 1억원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예대를 나온 그는 인천 전문대 선후배들과 학연을 바탕으로 연예인 섭외에 나서 그가 보은군의 각종 행사에 오게 한 가수만 해도 조성모, 베이비복스, 정훈희, 정수라 등 100여명에 달한다.
이응표씨는 과거의 것을 포스터나 팜플렛만으로 볼 수 없지만 지나간 시대의 기록 및 시대의 작품들은 우리 뒤 세대들을 위해서도 기록은 남겨줘야 한다며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훗날 문화예술 자료 전시관이나 더 나아가 영화 포스터 박물관이 지어져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기록물이 전시, 보존되길 희망하고 있지만 우선 당장 올해 가을 속리산 단풍가요제나 5월에 개최될 속리축전 행사에 ‘포스터로 보는 60∼70년대 흘러간 영화’ 등의 제목으로 전시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응표씨는 부인 김영옥(44)씨와의 사이에 대학생, 고등학생인 아들 둘을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