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 우리 마을 이야기 - 마로면 소여리
탄광으로 물이 부족했던 쇄 마을
2005-03-18 임향묵
과거‘쇄’라고 불리기도 한 소여1리는 옹기종기 가구가 모여있는 소여2리와 달리 가구가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50여 가구에 100여명 남짓한 사람이 살고 있다.
대부분의 농촌마을이 그렇듯 소여1리 또한 60대 이상의 노인분들이 많아 전체 인구의 4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한때 부락 내에 초등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되어질 만큼 군내에서도 보기 드문 많은 인구를 자랑하던 소여리지만 계속해서 줄어드는 인구로 인해 학교는 폐교가 되고 남아있는 몇몇 아이들은 주변 학교로 다녀야 하는 상황이다.
마을주민들은 “농촌 마을의 인구감소와 청소년들이 부족한 것은 무엇보다 교육환경의 부재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늘로 유명했던 마을
소여1리는 품질 우수한 마늘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마을 주민 대다수가 마늘 재배를 할 만큼 토양이 좋았다. 그 당시만 해도 마늘재배를 통해 군내에서 드물게 여름에 목돈을 만질 수 있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88년 폐광된 광산으로 인해 마늘 농사는 포기해야만 했다.
소여리는 외지인들이 지난 70년대 초반부터 다량의 석탄을 채취한 광산을 운영하게 되었다.
마을 전체 주민들의 주 생산품이었던 마늘은 광산으로 인해 땅의 수분이 부족해지면서 마늘 재배를 하지 못하게 되어 판매는 고사하고 현재는 마을 주민들 모두 돈을 주고 사먹어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현재 소여1리의 주 작물은 고추 위주의 밭농사가 대부분이며, 과일은 감나무를 재배하고 있다. 한때 11가구이상에서 1500평 규모의 배를 재배하였으나 그마저도 작년 폭설로 인해 많은 주민들이 정리를 한 상태이다.
또한 당시도 외지인들이 운영하고 있었기에 마을 주민들의 수입과는 거리가 없었던 광산은 폐광이 된 현재도 마을 주민들에겐 골칫거리일 뿐이다. 광산 갱도로 물을 빼앗겨 농업용수는 물론 식수마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3년 전 시작한 관정으로 식수는 어느 정도 해결하고 있으나 물이 부족한 것은 여전하다.
공동생활을 하는 마을
대부분의 농촌마을의 모습이 그렇듯 소여1리 또한 홀로 사시는 노인분들이 많은 마을 특성상 농번기가 아닌 기간에는 다들 마을회관에 모여 지내는게 특징이다. 마을 인구의 대부분이 중·장년층과 노인층인만큼 공동생활은 어쩌면 당연한 생활일 것이다.
8년전 지금의 마을회관이 새로 설립되면서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수월해진 까닭도 있다.
취재를 위해 마을을 방문한 날도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여1리의 청년회(회장 설만석)는 외지인을 포함해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노인인구뿐 아니라 중·장년층의 인구비율도 높아 회원만 780명을 차지하는 청년회는 부녀회와 연계하여 노인분들을 위한 효도관광 등 마을 행사를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에 대대로 행해져 온 동부사는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 운동 사업 중 하나로 시작된 미신타파를 계기로 사라져 갔다.
새마을 운동 사업으로 한창 바쁜 시기였기에 행사 절차나 과정이 복잡하고 힘들었던 동부사는 자연스레 모습을 감추게 된 것이다.
소여1리에는 마을에 각별한 애착을 갖고 있는 출향인들이 많이 있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지방경찰청에서 총경으로 승진했던 대구지방경찰청 보안1계장인 설용숙(47)씨를 포함 서울경기지역에 거주하는 박창수(64),김응권(52), 여동수(52)씨 등이 대표적인 출향인들이다.
그 중에서도 서울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박창수(64)씨는 마을회관 설립비 500만원을 기탁하는 등 마을의 대·소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큰 사업으로 벌은 돈이 아닌 작은 개인사업을 하면서도 마을을 잊지 않고 도와주는 따뜻한 온정에 마을 주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공민왕의 전설 서린 곳
소여리에는 공민왕과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마을이다.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에 두 번째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은 그해 11월 18일 서울인 개경을 버리고 경상도 복주, 즉 오늘의 안동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정세운, 이방실 등의 분전으로 홍건적을 괴멸시키고 개경을 도로 찾았다. 하지만 김용이란 자가 정세운의 전공을 시기하여 정세운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왕은 안동에서 상주로, 상주에서 청주로 가는 길에 마로면 관기리에서 약 3개월간 생활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소여리 큰말에서 송현리 웃솔고개로 넘어가는 산고개는 공민왕이 상주에서 이 고개를 넘어 관기에 오셨다는 의미로 왕래현이라 부른다.
왕은 이곳에서 곡식 창고도 짓고 성도 쌓게 하였으며 감옥도 만들도록 하였다. 오늘날 ‘원앙골’이 사창이 있었던 곳이며, ‘옥갈머리’는 바로 옥이 있던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마로면 소재지인 관기(官基)라 하는 것은 관기(館基)라 하던 것이 변한 것이라 한다.
공민왕은 관기를 떠나 청주로 가던 중 삼승면 원남에서 비를 만나 여기에서 하루를 머물고 갔다.
그때 왕을 따르던 염제신, 이암 등 일곱 원로 대신들이 모여 앉아 웃고 이야기하며 시를 짓고 놀 때, 대장군 김하적은 피리를 불고 김사혁 장군은 비파를 타고 대신 황석기가 부르는 시에 화답시를 지으면서 흥겨워했다는 것이다.
황석기의 시 한 구절을 소개하면 “푸른 옥잔은 깊고 술맛은 아름답구나. 거문고 소리는 느린데, 피리 소리 길다. 그중에 가느다란 노래소리 들리니 일곱 늙은이 서로 즐기는데, 수염은 서리같네.”
더욱 발전하는 마을로 변모 모색
소여리로 진입하는 도로는 지대가 낮아 매년 여름철이면 잦은 침수로 주민들의 불편이 심한 곳이다. 하지만 이런 소여리 주민들의 불편이 조만간 해결될 조짐이다. 비록 당장은 아니지만 군정사업의 일환으로 새로운 도로가 개설될 계획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을 주민들의 건강 증진과 생활의 편리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농촌건강관리실을 운영할 계획을 밝히고 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시행하는 농촌건강관리실은 찜질방 및 의료기 등을 갖춘 건강관리시스템장으로써 소여1리는 지원금 5천만원과 주민들의 작은 정성을 모아 회관 옆 빈 공간을 활용할 예정이다.
그에 따라 마을 대표자 및 주민들은 이미 관리실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는 마을을 견학해 앞으로의 운영방향을 잡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마을 주민들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마을 앞의 좁은 길의 포장 보수 공사를 건의할 예정이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콘크리트 바닥으로 많은 부분이 깨져 있고, 덧칠을 한 정도의 보수만 되어 있어 사용하는데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미관상도 보기 좋지 않다.
때문에 전체적인 포장 공사를 해 마을 주민과 그 길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의 불편이 해소되길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