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문화기행 (1) 내북면 봉황리 청벽산
이승칠·석성국의사 항일정신추모 - 역사왜곡, 독도문제 파장 선생은 아는지
2005-03-18 송진선
문화기행을 한다고 고지한 후 과연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참여를 할까 최소한 10명만이라도 참석이 됐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기행일을 기다렸다.
어떻게 참여하는 것이냐는 문의 전화는 몇 통이 있었을 뿐 어디 사는 누구인데 이번 문화기행에 참석을 하겠다는 다짐의 전화는 단 한 통도 없었다.
기행일 당일 아침 9시20분 불안은 현실로 나타나고 9시30분까지 기행에 참여하는 군민은 없었다.
삼년산향토사연구회 최규인 회장과 김홍춘 회원만이 나왔다.
출발은 미미하지만 그 꿈은 원대하다고 나름대로 위안을 하며 목적지인 내북면 봉황리 청벽산으로 출발했다.
선생의 항일정신 아직도 흐르는데
이번 기행의 목적지를 내북면 청벽산 이승칠 의사의 자결지로 선택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혜택’과 ‘근대화’를 주었다는 일제 식민지 통치 긍정론, 시혜론, 근대화론, 개발론을 널리 퍼트릴 정도로 일본의 역사왜곡이 심각한 수준이고 여기에 대한민국의 주권이 행사되고 있는 독도를 자신들의 영유권으로 억지 주장하는 굴절된 역사의식과 한반도를 침탈하려는 군국주의에 강력히 대응하며 항일정신을 고취하자는 뜻에서 비롯됐다.
기행에 참여한 일행은 최규인씨와 김홍춘씨까지 3명에 불과했지만 이승칠 의사의 항일 정신을 추모하고 역사를 바로 보며 자국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비장함에 산행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승칠 의사의 자결지는 알려져있다 시피 내북면 봉황리 봉황휴게소 옆 청벽산이다.
추모비를 지나 100m높이 되는 청벽산을 올랐다.
그리 높지 않고 또 목적지까지 매우 짧은 코스이기 때문에 굳이 등산로가 없어도 금방 청벽산을 오를 수 있을 정도인데 한눈에 봐도 등산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의 발길을 많이 받은 흔적이 나 있었다.
매우 짧은 거리였지만 숨이 턱에 차 오를 즈음 선생의 자결지로 예상되는 곳에 닿았다.
발아래 푸른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선생을 생각하며 목적지에 다다라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는 산외면 이식리까지 확연하게 보이고 삼각주를 이룬 잘 가꿔진 봉황 마을이 보였다.
한 눈에 봐도 농사가 잘 되는 풍요로운 땅으로 보였다.
그리고 깊을 수록 물의 색깔이 더욱 푸른빛을 띠는 것처럼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을 매우 깊어 보이는 봉황달천이 아찔하게 다가왔다.
달천이 봉황리 마을을 멀리 휘돌아 감아 나가면서 바로 청벽 산아래서 최고 깊이의 하천을 만들었다.
달천과 청벽 사이에 도로가 있지만 청벽 정상에서는 도로는 보이지 않고 푸른빛이 감도는 달천만 보였다.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발이 떨어졌을까.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이승칠 의사의 의로움을 다시 한 번 접하게 했다.
이승칠 의사가 고향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청벽에 올라 고향마을을 눈에 넣으며 항일 의지를 불태우며 자결을 결심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의사승칠공항왜의결기념비’에는 청벽산 낭사대에 올라가 순절했다고 표현했고 일중당 간행의 국사대사전에서는 봉황정 절벽 위에 올라가 자결했다고 적고 있는데 낭사대나 봉황정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승칠 의사는 누구
이승칠 의사는 1850년 철종 1년에 태어나 1912년 순직한 구한말의 의사로 자는 두경(斗卿), 본관은 천주로 경주영장(慶州營將) 지현(之鉉)의 아들로 내북면 봉황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총명하고 기개가 곧고 굳어서 부모의 총애를 받고 자랐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1867년 고종4년 무과에 급제해 주부를 거쳐 송라찰방을 역임하고 1886년인 고종 23년 사헌부 감찰이 됐다.
독립유공자서훈록과 보은군지에 의하면 1910년 순종 4년 한일합방에 반대해 자결을 기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다 1912년 명치가 죽자 경찰로부터 상복 입을 것을 강요당했다.
이 의사는 ‘비록 죽을 지언정 상복을 입을 수는 없다’고 거절해 왜경들에게 곤욕을 치렀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의사는 나라를 잃은 백성의 통분을 억제할 수 없어 봉황정 절벽에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후 푸른 못 속에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유서에는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다. 원수의 상복을 입으면 백대의 수치이니 비록 죽을지언정 오랑캐의 상복을 입지 않겠다.(天無二日 民無二王 身被讐服 百代之羞 寧爲殞首 子服夷狄)
1959년 내북면 애향동지회에서 이의사가 자결한 곳에 기념비를 세웠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석성국 의사 묘지도 참배
돌아오는 길에는 내북면 이원리에 안장된 석성국 의사묘지를 참배했다.
의병장인 석성국 의사는 1885년 고종 22년에 내북면 이원리에서 출생해 1908년 순정 2년에 순직했다.
키가 작으나 매우 용맹한 성품의 소유자로 가세가 기울자 상업에 종사했다.
1910년 한일합방 전 이미 내정을 간섭하고 대한제국의 침탈야욕을 가진 일본에 의해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었다.
석의사는 당시 속리산에서 의진(의병)이 형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생업을 버리고 의진에 들어가 한봉수의 참모장이 되었다.
회북면에 주둔한 헌병대를 습격 방화하고 헌병을 사살하는 등 격렬한 전투를 전개했다.
1908년 적정을 탐색하기 위해 홀로 의진을 떠나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 적 수십여명에게 포위되었고 그는 이때 적의 총과 칼을 빼앗아 온 힘을 다해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검거돼 온갖 고문을 다 받았다.
석의사는 끝까지 굽히지 않고 결국 혀를 깨물어 끊고 말을 못하게 하고는 자신의 성기를 뽑아 24세의 나이에 자결했다고 한다.
석의사의 용맹성과 구국의 정신 못지 않게 그의 부인 역시 그런 지아비를 추모하는 마음 지극했다.
석의사의 자결 소식을 들은 그의 부인 성산 이씨는 현지에서 남편의 시신을 수습,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 3일 후 자신도 남편의 묘소에서 자결했다.
석의사와 부인시신은 내북면 이원리에 합장됐다.
1968년 내북면 애향동지회에서 묘비를 건립했고 1963년 대통령 표창이 있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이의사, 석의사 자결의 뜻을 기념할 것인가 추모할 것인가
봉황리 이의사가 자결한 곳에는 내북면 애향동지회에서 1959년 이승칠의사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비석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비 이름을 기념비라고 했는데 이의사의 뜻을 기념하기 보다는 추모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비석 주변으로 울타리를 설치해 사람들이 비문을 자세히 읽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물놀이를 온 사람들의 주차를 막기 위해서라면 굳이 울타리를 설치하지 않고 높이가 좀 있는 경계석을 사방에 설치하고 사슬을 둘러치면 차량은 진입할 수 없고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 비문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또 내북면 애향동지회가 1959년 세운 비석이 낡아 1991년 석상태 군수시절 다시 건립했는데 비를 다시 건립하면서 옛날 비석은 철거해 흔적이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역시 석성국 의사와 관련된 비도 마찬가지다. 기념비보다는 추모비가 맞는 듯 싶었다.
1968년 내북면 애향동지회에서 묘비를 건립한 후 1991년 재건립하면서 옛날 비석을 철거해 옛날 비석도 함께 보존이 됐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컸다.
1백년전 일제가 총칼을 앞세워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해 우리의 주권을 빼앗아 갔던 바로 그 해에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하여 우리의 영토인 독도를 자국에 일방적으로 편입시킨 뒤 이번 다케시마의 날 제정 획책은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 침략근성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이번 문화기행을 통해 항일정신, 극일 정신을 고취시키고 또 일본과의 자매결연 단절,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여 일제의 망동에 대한 우리의 경고메시지를 강하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