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인물탐방 -병암 구수복 선생(1)

2005-02-04     송진선
병암 구수복 선생(1491∼1535)

지난해 내고장 인물 탐방으로 충암 김 정 선생을 게재한 바 있다.
이번호부터 앞으로 8회분 정도로 병암 구수복 선생을 게재한다.

우리나라의 정사와 야사에 기록된 사료를 통해 기묘명현 병암 구수복 선생의 생애와 인물평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
개략만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하며 부득이 인명 표기에 존칭이나 경칭을 생략한다.

1. 성장배경

능성구씨는 고려 고종연간(高宗年間)에 문과에 장원급제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 상장군을 지낸 구존유를 시조로 한다.

구존유의 10세 성균 생원 구 이(1460-1504)가 덕수이씨 문인파계 중조인 지돈령부사 강평공 이명신의 증손녀 이며 현감 이의영의 따님인 덕수이씨와 결혼해 4남1녀를 낳으니 맏아들은 통정대부로 예천군수가 된 구수연이고 둘째아들은 병암 구수복(1491-1535)이다.

중간은 광산인 김의에게 출가한 딸이고 셋째아들은 문과급제 후 등관해서 대사헌 참판을 역임했던 을사명현 폄재 구수담이며 막내아들은 신안 구수팽으로 능성구씨 봉계 문중의 향조이다.
구수복은 자가 백응(佰凝)이고 호는 병암(屛菴)인데 수재(睡齋)라고도 했다.
성종 22년(1491) 7월2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열네살 되던 해의 4월과 8월에 넉달 간격을 두고 양친이 별세해 졸지에 조실 부모로 어쩔 수 없이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외가살이를 했다.
막내동생 구수팽은 돌맞이 유아였으므로 등에 업고 다니면서 넋을 얻어먹여 키우며 불우하게 성장하면서 겨우 다섯 살인 바로 아래 동생 구수담과는 오직 학문에만 전념해 둘이 다 스무살 적에 차례대로 생원 합격하고 이내 문과에 급제해서 등관 후에 청현직을 두루 거쳐 역사에 맑은 이름을 남긴 명현이 됐다.

2. 과거 급제와 등관
구수복은 중종 5년(1510)에 생원에 합격해서 중종 11년(1516) 문과에 급제했다.
대과급제 후에 처음 등관해서는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부터 시작해서 한림(翰林) 즉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을 거쳐 승정원 주서(承政院 主書)가 됐다.

정암 조광조와 충암 김 정과 각별히 의기상합(義氣相合해)해 경연에서 활약한 행적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 주청사(奏請使) 교체(交替)를 아룀
중종 13년 5월13일 “주청사(奏請使) 최숙생이 늙고 병들었다 하여 재삼 사양하고 대간(臺諫)도 말을 하니 두 정승에게 물어라” 하는 전교가 있자 주서(主書) 구수복은 주청사에 관한 일을 두 정승에게 수의(收議)하여 아뢰기를 “최숙생은 고사(古事)에 박식하고 글에도 능통하니 신(臣) 등은 전대하는 임무에 매우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평시에도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않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가 비록 무사히 북경에 간다하더라도 이 일은 다른 사신과는 같지 않습니다. 통사(痛事)와 함께 몸소 예부(禮部)와 통정사(通政司) 등에 나가 간곡히 청하고 정성을 다한 뒤라야 준허(準許)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없는 사람을 택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중종이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전교했다.

◆ 공신책록(功臣策錄)과 관직제수(官職除授) 부당(不當)을 아룀
중종 13년8월6일 주서 구수복은 홍문관 부수찬(弘文館 副修撰)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으로 승진을 거듭해 9월21일 조강(朝講)에 들어가서 장령 김인손(掌令 金麟孫)과 함께 이희옹(李希雍)의 공신책록(功臣策錄) 삭제와 충청도사 최 호(崔 灝) 및 공조 정랑 권 의(權義) 외에 허 금(許 錦), 이세무(李世茂) 등의 관직 제수가 부당한 일임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서얼(庶孼)의 등용(登庸)을 아룀
중종 13년 10월3일 구수복은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석강(夕講)에서 아뢰기를 “서얼은 법이 이미 그러하지만 어진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과거(科擧)에 구애되어 포부를 펴지 못하니 이것도 사람을 쓰는 길에 방해가 됩니다” 했다.

◆ 성리대전(性理大典)의 강론자(講論者)로 뽑힘
중종 13년 11월6일 승정원(承政院)이 「성리대전(性理大典)」을 강(講)할 만한 사람 26인을 뽑아서 아뢰었는데 그 절목(節目)은 “강독(講讀)하는 사람은 하루에 2∼3장을 보되 만약 쉽게 이해되는 곳은 장수(張數)에 구애되지 않으며 순말(旬末)에 이르러 홍문관에 모여서 서로 질문해 변정(辨正)하고 월말에 이르러 홍문관의 장무관(掌務官)이 그 달에 질정(質定)한 장수(張數)를 써서 아뢰고 또 사철 끝 달에 강독하는 날은 임시에 취품(取稟)한다.

또 홍문관의 대제학(大提學). 제학(提學) 및 김안국(金安國), 이 자(李 자), 김 정(金 淨), 조광조(趙光祖) 등이 질문하고 변정하는 날에 매양 와서 논란하며 또 이 선발에 끼지 못한 사람이라도 앞으로 홍문관에 들어가는 자는 또한 강독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 선발에 참여된 사람은 공서린, 김정국, 신광한, 김 구, 민수원, 기 준, 정 응, 권 운, 구수복, 윤 형, 이 인, 정순봉, 민수천, 유 돈, 한 충, 윤자임, 최산두, 정옥형, 박세희, 황효헌, 이약빙, 장 옥, 이충건, 이희민, 조언경, 김 식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구한회(마로 관기 출신, 서울 여의도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