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주의의 벽을 넘어서

어수용(탄부 사직, 대전고법 판사)

2000-01-22     보은신문
연고주의라 함은 혈연, 지연, 학연 등 연고를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집단을 구성하고 동류의식으로 뭉쳐 특별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종친회, 동창회, 향우회 등이 연고주의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집단이고, 그 밖에도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연고집단이 존재하며, 그 집단 내부에는 더욱 작은 단위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누구나 이러한 집단에 한두 군데 속하여 있지 아니한 사람이 없고 그 영향력을 실감하여 보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거대한 연고주의의 늪에 빠져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연고주의는 사회의 경쟁력을 약화시켜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다. 자질과 능력이 모자라더라도 영향력 있는 연고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그 힘에 의존하여 연고가 없는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다면 그만큼 자기개발에 소홀할 수 있다. 또한 연고주의는 상호간의 불신을 초래하고 집단간의 갈등을 조장하며, 불만과 재대결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내가 남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연고집단의 소속원으로서 특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결과에 대해서 쉽사리 승복하지 않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러한 연고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기와 같은 지역출신, 종친, 동창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격이 미달하거나 도덕성이 결여된 자들을 선출하고, 연고에 따라 지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면 합리적인 토론과 정책대결을 기반으로 하는 정상적인 민주주의는 설자리를 잃게 된다.

특히 우리는 얼마 전부터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시행하여 아직은 그 초기단계에 있다. 국가적으로 지역분할구도가 고착되어 있는 현실에서 올바른 지방자치제를 정착시키는 일은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 발전에 주춧돌 역할을 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자치선거에 있어서 노골적으로 연고를 이용하여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거나 관료조직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줄세우기를 하는 등 바람직스럽지 못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 놓은 각종 제도나 관행 중에는 집단간의 이해를 절충하여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기 위한 것이 많다.

이러한 제도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제도 본래의 취지대로 따르지 아니하고 연고에 따라 사람의 자의가 부당하게 개입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연고주의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제도가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하고, 특히 제도의 시행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투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본래의 목적 범위 내에서라면 종친회, 동창회, 향우회 등의 연고집단도 분명 필요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그 보다는 이웃에 봉사하거나 공통된 사회 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많이 생겨나야 하고, 이에 가입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야 한다.

힘 있는 연고집단의 일원임을 과시하기보다는 공익을 추구하는 사회단체에 가입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부러워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단체들이 개인의 이익에 앞서 공통선과 보편적 인류애를 추구하면서 그 이상을 사회 전반에 실현하여 나간다면 연고주의는 점차 발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연고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나 억울하게 차별대우를 받는 피해를 당할 수가 있다. 나아가 현실에 안주하고 미래의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연고주의를 이용하게 된다면, 국가적으로도 더욱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지금까지 연고주의는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우리의 곁에 우리의 의식 속에 살아 왔다. 이제 패거리를 만드는 데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의 마음 한 편을 도려내자. 연고주의를 배격하는 것이야 말로 더 크게 그리고 더 길게 본다면 오히려 그 연고집단을 위하는 길이 된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되새겨 보자. 여기서부터 우리 고장에 대한 애향심을 실천하는 출발점을 찾아보자.

<정이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