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ㄱ’, ‘ㄴ’ 배우러 학교가자
2004-10-23 보은신문
한글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려는 세종대왕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글자다.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소리만을 가지며 어휘 종합능력도 900여 개나 돼 중국어의 400여 개, 일본어의 300여 개와는 비교도 안 된다. 세계적 언어학자들도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글자로서 세계 문자 중 으뜸이라고 말한다.
이런 글을 배우고 가르치고자 작은 학교가 문을 열고 있다.
'한글 배움터'. 나는 이 학교의 교감이다.
학생수도 예닐곱 명이 들락날락하고 부지깽이도 거들어야 할 일 철이면 그 마저도 안 되는 학생 수에 자원 봉사하는 선생님의 수가 더 많은 그런 학교이다.
한글 배운다고 방송 출연한 학생의 남편으로부터 해물짜장을 받아먹기도 하며, 호박에 깻잎짠지에 금품을 제공받기도 한다.
제사지낸 그 다음날엔 집에서 담근 동동주에 동그랑땡이며 명태전에 귀밝이 술까지 음주 수업도 한다.
일흔 넷 된 학생이 1-2학기 책을 다 배우고 책씻이하는 날에는, 영감님이 도가에서 막걸리도 받아오고, 논에서 잡은 우렁이를 새콤달콤 무쳐서 한 찬합 담아 들이밀고는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문 밖에서 막걸리 잔만 받고는 황망히 나가신다.
그저 살아서 그나마 라도 정신 있으니까 다니는 게 고맙다며......
죽기 전에 눈이라도 한 번 뜨고 죽어야 여한이 없지.
새로 오신 신입생 어머니는 새 가방에 공책, 지우개사고, 뽀얀 분에 구찌배니까지 이름자도 못 쓰는 분이.
지금은 맨 앞자리에 앉아 당신이름 쓰는 거 배우고, 아들, 손주 이름, 집 주소 쓰는 거 열심히 배워 나가신다.
이분들은 그러신다.
그래도 글씨 맛이라도 보니까 주차장가서 무조건 차 안 탄다. 글씨보고 타지.
노래방가서 가사 읽어가며 노래하고 제일 좋은 건 병원에가 물리치료실, 주사실 찾아다닌다는 거.
그래서 선생님은 하늘이다.
막내딸 같은 선생님들 앉으라고 손바닥으로라도 의자를 훔쳐내 놓고 깍듯하게 두 손 모아 허리 굽혀 인사하신다.
욕심에 수학도 가르쳐 드렸다.
일의 자리, 십의 자리, 백의 자리를 왜 그렇게 어려워 하시는지......
삼에서 육을 빼는데 못 빼니까 옆집에 가서 좀 꿔오라는 게 그게 너무한 건가?
그렇게 꿔 오는 게 미안해서 어찌 수학공부를 하실꼬?
몰랐으면 차라리 뱃속 편한 걸 괜히 속을 끓이신다.
이런 거 다 몰라도 내 밥그릇에 밥 줄어 드는 거 아니고 죽을 때 눈 못 감을 것도 아닌데.
고추따기도 바쁘고, 깨 타작, 콩 타작 일거리는 쌓였는데......
그래도 낫 놓고 'ㄱ'자 뿐이랴, 'ㄴ'자도 알고, 가락지 빼 놓고는 'o'자도 배워야지.
학교 가자.
정 해 자(한글 배움터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