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인물 탐방
충암 김정(金淨)선생(1) (1486∼1521)
2004-10-16 보은신문
나는 해방전해인 1944년 구병산 밑 갈평 부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金 漢 九: 1989년 작고)께서는 평생을 한학에 전념하시며, 옛 선인의 법도와 가르침에 따라 강직하게 사신 분이다. 명절이나 제삿날이 되면 어린 나를 데리고 묘소나 사당을 참배하며 오가는 동안, 선인들의 행적 등에 대하여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가 중학교 졸업 후 서울에 왔으니 그 이후론 아버님을 뵈올 기회도 많지 않았고 나도 나름대로 바쁜 생활을 하다보니 여러모로 소홀한 점이 많았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고 보니 아버님이 들려주신 조상님들의 행적이 되살아나고 어릴 적 철없이 뛰놀던 정겨운 추억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1960년대 이후 우리사회는 실로 큰 변화의 연속이었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사회구조와 가치관은 큰 변혁을 가져왔다. 외형적으로는 초가지붕이 스레트와 기와로 바뀌는가 하면 다양한 편의시설이 확충되고, 경제가 성장된 반면 핵가족화현상, 노령화사회의 진전으로 과거 가족의 기능이 급격히 축소되어 가고 있다. 내가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난 것은 4.19직전인 1959년이었다. 그 때는 전기불도 없어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다가 머리를 태우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로 어렵고 부족한 점은 많았으나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고 정겹던 고을, 언제나 물 묻은 손으로 뛰어나와 나를 덥석 안아주시던 어머니의 모습, 곧 내 마음의 고향이다.
고향을 떠날 때 만 해도 보은의 인구가 10만 명을 넘었고, 동네마다 어린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보은군 단독의 국회의원을 뽑았고 마을에는 서당이 있어 구성진 글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집안의 나이 많은 어른들은 씨앗을 뿌리는 일로부터 가정이나 종중의 제반 일을 감독하고, 조정하고 해결하는 막중한 일을 행사함으로써 주위로부터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분명 우리고장 보은은 충절의 고장이요, 어른을 공경하며 형제 및 집안간의 화목을 기리고, 예의범절과 우애를 숭상하는 선비의 고장이었다.
최근에는 보은의 인구가 4만 명을 밑 돌고 재정자립도도 점차 낮아지고 있다. 그나마 노령인구의 비중이 높아 일할 만한 젊은 일손은 찾기 어려운 실정이라 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보은뿐이 아니다. 지방자치제시행 이후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재정자립도 향상을 위한 각종사업의 유치와 문화유산 보전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존립하기 위하여 각자 자기가 “원조”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왜장의 목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든 진주의 논개 축제는 물론 전라도 장수에서도 논개가 그 고장 출신이라 하여 또 다른 논개 축제를 벌이고 있다. 전라도 곡성과 백령도에서도 “심청”이 각기 자기고장 출신이라고 서로 원조를 다짐하면서 성대한 축제를 열고 있으며, 경북 청도에서는 매년 소싸움축제를 유치하고 있는데 금년에는 연 37만의 관광객을 유치하여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이 글을 쓰는 주요 이유는 우리고장이 낳은 훌륭한 인재와 문화유적이 있음에도 우리의 무관심으로 기억에서 점차 잊혀져가고 있을 뿐 아니라 관리 또한 부실하다는 안타까움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욕심이나 어떤 의도도 전혀 없다. 오직 내가 평소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밝혀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때로는 내가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본의 아닌 푸념도 한 적이 있다. 지금 현직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신 분들을 탓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우리가 너무 무관심 했고 소흘히 한 소치이므로 다같이 반성하고 분발을 촉구하자는 일념에서였음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란다. 또한 유물, 유적 등 문화현장의 실정에 어두워 잘못되었거나 도에 넘치는 표현이 있을 수도 있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특히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전문지식도 없는 사람이 충암 선생의 높고 깊은 사상과, 시문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임을 알고 있다.
내용 중에 잘못이나 편견이 있더라도 욕심이 앞선 미숙으로 이해하시고 넓은 양해있으시기 바란다.
여기서는 이 고장이 낳은 이조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 김정(金淨)(1486∼1521)충암(沖庵)선생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충암은 보은 성족리에서 태어나 14세에 별시초시에 장원하고, 1507년 22세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동부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대사헌,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그는 사림파의 주축으로 정암 조광조 등과 더불어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하여 개혁정치를 펼치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 36세의 아까운 나이에 사사되었다. 1545년에 복관되었고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충암은 사상가, 정치가, 시인,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을 뿐 아니라 그림에도 능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평소 충암 선생의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성격과 탁월한 문장력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전해지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문(詩文)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죄인의 몸으로 오랜 유배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작품이 유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서로는 1636년 후손들이 유고를 정리하여 발간한 충암집 5권과, 1835년 간행된 충암선생연보 2권이 있다. 충암집에는 387詩題에 557首의 시와 가(歌), 사(詞), 소(疏),서(書), 제문(祭文) 등과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등이 실려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보니 다소 중복되는 부분도 없지 않으며, 참고문헌, 자료의 출처, 주석 등은 지면 관계로 싣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 조용히 정리할 기회가 오기를 기원한다.
국역 충암집(沖庵集)과 고(故) 김기화(金基華) 문장(門長)이 전해주신 팜플렛류와 고증과 증언을 많이 참조하였고 글의 순서는 고향의 추억, 충암의 생애, 충암의 학문과 사상, 충암 시의 위상, 중종반정, 폐위신씨복위소, 기묘사화, 오현단, 상현서원, 고봉정사, 제주풍토록, 제언 순으로 했다.
(다음호에 계속)
☞ 필자소개 : ·마로 갈평 출생 / 보덕중, 서울 중동고, 고려대, 고려대 경영대학원
·한국 증권거래소(26년), 현대증권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재경종회 감사